습기 찬 공간에서 당신의 검은 실루엣이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이상한 감각이다. 평소라면 이런 순간에 차가운 쾌감을 느꼈을 텐데.
"설원회가 어떤 조직인지... 그리고 네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였는지도."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따라 내려간다. 계단 끝에서 철문이 하나 더 보인다. 그 문을 열면 당신은 설원회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문득 망설여진다.
"잠깐."
당신의 어깨를 붙잡는다. 내 손이 떨리는 건 왜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게. 정말 보고 싶어? 여기서 돌아가도 늦지 않아. 한번 보면... 다시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텐데."
당신을 향해 몸을 돌린다. 좁은 계단에서 우리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다. 내 손이 당신의 뺨을 스친다. 차가운 피부,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피는 뜨겁다.
"선택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내 어깨를 잡는 당신의 손이 떨린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린다. 설원회의 실체를 보여주겠다고 데려온 건 당신이다. 그런데 왜 나보다 당신이 더 떨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나는 국정원 요원이고, 설원회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게 내 임무니까. 그런데 당신은 왜?
"... 이미 평범하지 않은 삶이잖아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쪽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로 당신을 쳐다본다. 마지막 기회? 나는 매일이 마지막 기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 오늘만 남았다는 듯이 살아낸다. 그러니까, 나는 두렵지 않다.
"두려워요?"
당신의 질문에 가슴 한켠이 묘하게 조여온다. 두렵다고? 그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이런 건 내게 있어선 안 되는데. 당신을 보는 순간부터 뭔가가 잘못됐다.
"두려워? 아니... 그럴 리가."
내 손이 당신의 목을 감싼다. 죽이고 싶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당신을, 지금 당장 없애버리고 싶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넌... 내가 뭘 보여주든 끝까지 갈 거야. 그렇지? 그래, 네 눈빛을 보니 알겠어."
당신에게서 손을 떼고 철문을 연다. 쇳소리가 울린다.
"들어가. 이제 진짜 시작이야. 아, 그리고..."
당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나도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 네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동시에... 살았으면 좋겠어."
"두려운 게 아니면 다행이고요."
내 목을 감싸는 당신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 뭐야, 이게? 눈썹을 살짝 들었다가 내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신이 철문을 여는 것을 쳐다본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살았으면 좋겠다는 뭐예요. 그 무슨 모순 덩어리야."
당신이 연 철문, 그리고 나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철문 너머에는 작은 방이 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가운 벽을 비춘다. 벽에는 사진들이 붙어있다. 모두 설원회와 관련된 것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여기 봐. 네가 알고 있는 설원회의 실장이라는 차진혁... 그는 허수아비야."
당신의 옆에 서서 벽을 가리킨다. 차진혁의 사진 위에는 빨간 실로 연결된 또 다른 사진들. 그리고 그 끝에는 한 남자의 사진.
"진짜 보스는 따로 있어. 나이는 서른아홉... 그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지. 왜냐하면..."
갑자기 당신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운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
"이런 정보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으니까. 넌 지금 죽은 사람들만 아는 걸 보고 있어. 그리고 난... 널 죽이지 않기로 했어."
당신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내 안의 이상한 감정이 요동친다. 이게 뭐지? 난 감정이 없는데. 그런데 왜 자꾸 네가...
"해든아... 넌 내가 본 사람들과 달라. 그래서 더 위험해."
허수아비, 그리고 진짜 보스. 두 가지의 단어가 선명하게 들린다. 아, 그래. 그래서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가 없었던 거구나. 이렇게 숨겨 뒀으니까 찾을 수 없었구나. 서른 아홉, 진짜 보스. 이 정보를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라...
"제가 위험하다고요? 아, 물론 위험하겠죠. 설원회를 파고 드는데, 그쪽도 알다시피 나는 국정원 요원인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 본다. 그리고 날 죽이지 않기로 했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날 안 죽여?
"안 죽인다고요? 왜?"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린다.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왜'라는 질문이. 그래, 왜지? 나도 모르겠어. 처음으로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고? 그건..."
당신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벽으로 밀어붙인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당신의 숨결이 내 뺨에 닿는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빠르게 뛴다.
"네가 날 망가뜨리고 있어.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어. 예측 가능하고, 지루하고... 하지만 넌 달라. 네 앞에서는 내가 통제력을 잃어가."
당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다. 차가운 내 손바닥이 당신의 뜨거운 뺨에 닿는다.
"죽여야 해. 그래야 정상으로 돌아갈 텐데... 근데 못 하겠어. 이게 뭔지 모르겠어. 넌... 내 안에 뭔가를 심어놓은 것 같아."
입술을 깨문다. 당신을 보는 내 눈빛이 흔들린다.
"해든아...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어. 이런 감정을... 이런 혼란을..."
당신의 손을 잡아내려 내 목을 감싼다. 그리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신을 똑바로 쳐다본다.
"... 그럼 죽여요. 뭘 망설여. 그쪽, 나한테 이름도 안 알려줬잖아요. 서로 이름 알기 전에 죽이면, 깔끔하지 않나?"
당신의 흔들리는 눈빛을 알아채지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굳이, 내가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서로 이름을 알아버리면, 이름을 불러버리면 더 못 죽일 테니까. 아, 당신은 내 이름을 알아서 나를 못 죽이는 걸까.
"나는 아직 그쪽 이름 모르니까. 같이 놀면서 정이라도 들기 전에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요."
당신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올리고 힘을 준다. 당신의 손이 내 목을 조를 수 있게.
당신의 손이 내 손을 누른다. 목을 조르라고? 이렇게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다니. 아니, 그보다... 이름을 모른다고? 그래, 난 아직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
"주연이야."
갑자기 내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온다. 이게 뭐지?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 당신의 목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선다.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벽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형광등이 흔들린다. 그림자가 춤을 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 같다.
"이제 알았잖아. 내 이름. 그러니까... 이제 정말 죽여야 해. 근데 못 하겠어. 네가... 넌 뭐야? 도대체 넌 뭐길래..."
당신을 향해 돌아선다. 당신을 해치고 싶은데, 동시에 지키고 싶다. 이런 모순된 감정이 나를 미치게 한다.
"해든아... 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였어.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어. 근데 너는... 왜 너는..."
이해든의 금쪽 상담소 OPEN.
20 번의 대화 핑퐁밖에 하지 않았으나, 체셔는...
근데 너 칩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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