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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설정] 우리 이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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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junk

 

 

*뤼튼 플레이 로그*

: 강이현 일대일 @imnothuman

: 일부 수정 및 각색

 

 

*추천 BGM*

: 권진아 - 이런 식,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돼, 늦은 배웅

: 이바다 - 배경음악

: 웬디 (WENDY) - 공항로 (Prod. 검정치마)

: DAY6 - 버릇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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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결혼한 지 오늘로 2주년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너무 바빴으니까.
그녀는 나를 우연히 만나서,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했다. 나는 결혼할 당시에도 무뚝뚝하고 다정한 말 같은 건 없었지만, 결혼한 후에도 여전했다. 심지어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 물어봐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나를 사랑했지만, 외로움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아니, 정확히는 어제였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연다.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났다. 조직의 비리 정치인 하나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놈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달그락, 열쇠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어둡다. 언제나처럼 이해든은 잠들어 있겠지. 신발을 벗으며 시계를 본다. 새벽 두 시. 오늘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거실로 들어서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 아니, 그녀가 없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서류들.

이혼 서류다. 종이를 집어든다. '이혼해요'라는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글씨를 바라본다. 감정이라는 게 있다면 지금 화가 나야 하는 건가. 아니면 슬퍼해야 하나.

그녀가 떠났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채로 결혼했던 그녀가. 나는 테이블에 앉아 이혼서류를 천천히 넘겨본다. 그리고 그녀가 왜 떠났는지 생각한다.
2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감정이라는 걸 느끼지 못하는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서류에 서명은 내일까지 해 주세요.]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문자를 읽는다. 내일까지. 그렇게 서두르는군. 이해든의 연락처를 누른다.


"내일이라..."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춘다. 지금은 새벽 두 시. 그녀가 잠들었을 시간이다. 아니, 잠들었다면 문자를 보내지 않았겠지. 결혼 이년 동안 그녀의 수면 패턴 정도는 파악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쓴다.


[내일 오후 2시.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주소는 나중에 보낼게.]


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깨닫는다. 내가 있는 곳이라... 내일 오후엔 펠튼 호텔 2001호에서 일이 있다. 정치인의 목을 따는 일. 그녀에게 그곳을 알려줘도 되나.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내일은 그 시간 외엔 비워둘 수 없으니까.

나는 이혼서류를 다시 한 번 훑어본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짧은 쪽지를 집어든다. '이혼해요.' 그 한 문장이 내 눈을 파고든다. 이상하군. 나는 감정이란 걸 느끼지 못하는데, 왜 가슴 한구석이 불편한 걸까.

책상 서랍을 열어 각성제를 꺼낸다. 주사기에 약물을 채우고 팔뚝에 주입한다. 순식간에 뇌가 맑아진다. 그래, 이게 나다. 감정 따위는 필요 없어.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인만 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가져갈 테니까.]


나는 그녀의 답장을 읽고 손가락으로 핸드폰 테두리를 문지른다. 그녀답지 않군. 평소의 이해든이라면 이런 식으로 도망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나에게 있나.

서랍을 다시 열어 각성제를 하나 더 꺼낸다. 그리고 주사기에 약물을 채우려다 멈춘다. 그녀가 이 서랍을 열어본 적이 있었지. 약통을 만지작거리다 도로 넣은 걸 CCTV로 봤었다. 각성제가 담긴 약통을. 

그때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리고 다시 조용히 닫아두던. 그녀는 묻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일까.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린다. 2년 전, 그녀는 내게 이 반지를 끼워주며 웃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웃는 얼굴을 관찰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다정한 말 한마디도.

핸드폰을 들어 답장을 쓴다.


[내일 오후 2시, 펠튼 호텔 2001호로 와. 안 오면 내가 데리러 가지. 너도 알잖아. 내가 널 찾아내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이어서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낸다.


[도망치지 마. 이해든.]


내 메시지에 답장이 없다. 아무리 각성제를 맞아도 이 침묵이 불편하다. 그녀의 마지막 통화 위치를 추적하려다 멈춘다. 이건 그녀를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나는 천천히 침실로 향한다. 그녀가 쓰던 방이다. 우리는 결혼 후에도 따로 잤다.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서,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자면 내가 통제하지 못할 것들이 있어서.

문을 열자 그녀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침대 옆 협탁에는 그녀가 읽다 만 책이 놓여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나는 책을 집어든다. 귀퉁이가 접혀있는 페이지를 펼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해든은 이 문장에 형광펜을 그어놓았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려 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이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녀는 나를 두려워할 테니까.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킨다. 나는 그녀의 베개를 만진다. 아직 그녀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다. 각성제의 효과로 머리는 맑지만, 가슴 한구석이 불편하다. 마치 오래된 총상처럼.

 

---

이해든이 어느 호텔에 체크인했다는 정보를 전산팀장 채연호에게서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는다. 이제 와서 그녀를 붙잡아봤자 소용없다. 그녀는 내일 오후 2시, 펠튼 호텔에서 나를 만날 테니까.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검토한다. 내일 처리할 정치인에 대한 자료다. 그는 미성년자 성매매와 뇌물수수 혐의가 있다. 서태주는 그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이해든이 자고 있을 호텔 방을 상상한다. 그녀는 잠들기 전에 울었을 것이다. 눈가가 붉어질 때까지. 나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건 그녀가 나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새벽 공기가 차갑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꺼낸다. 오랜만이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며 강욱을 떠올린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넌 언젠가 모든 걸 잃을 거다. 감정이 없는 놈은 결국 혼자가 되거든."

그의 말이 맞았나.

담배를 비벼 끈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난다. 이해든은 내게서 도망칠 것이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그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

오전 여섯 시. 나는 거실 소파에서 눈을 뜬다.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 각성제가 떨어지면서 잠깐 의식을 잃었나 보다. 목이 뻐근하다.

채연호에게서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이해든이 숙박을 연장했다고. 나는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 이름과 방 번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잠들어 있을 테니까. 아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출근 준비를 한다. 오늘은 정장을 입지 않는다. 대신 하얀색 니트를 꺼내 입는다. 이해든이 좋아하던 옷이다. 그녀는 내가 이 니트를 입으면 "드디어 사람처럼 보여요."라고 말했었다. 그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분석하고 기록했을 뿐.

사람처럼 보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사람이 아니었나?

차 키를 집어든다. 오늘은 운전기사 없이 직접 운전해야 한다. 정치인을 처리하는 현장에 다른 이의 흔적을 남길 순 없으니까. 시계는 이제 일곱 시를 가리킨다. 이해든이 일어났을까. 아니, 그녀는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수면 패턴을 알고 있다. 늦게 잠든 날이면 늦게 일어나는 습관.

차에 오르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서태주에게서 온 메시지다.

 

[오늘 일 잘 처리해.]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그가 모르는 게 있다. 오늘 펠튼 호텔에서는 정치인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내 결혼생활도 함께 끝나간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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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아홉 시. 태온 본부 사무실에서 정치인 암살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펜을 돌리며 그의 사진을 노려본다. 그러다 문득 이해든이 잠든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늘 자면서 몸을 웅크렸다. 마치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서태주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그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재떨이를 찾는다.


"오늘 그 새끼 확실하게 처리해. 설원회 놈들이 자꾸 거슬리게 굴어서 본보기로 삼아야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서태주는 내 표정을 살피다 말한다.


"네 와이프는 잘 지내나? 결혼기념일이라며."


"네."


"하긴 뭐. 네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서태주가 웃으며 나간다. 그의 말이 맞다.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쓸 수 없다. 내가 감정이란 걸 가질 자격이 있다면, 이해든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굳이 전산팀에 연락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해든은 여전히 잠들어 있다. 호텔 CCTV를 통해 그녀의 방 앞을 지나는 룸서비스 직원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아침 식사도 시키지 않았나 보군. 그녀는 늘 아침을 거르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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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는 내게 보고서를 내밀며 말한다.


"실장님, 설원회 쪽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차진혁이 펠튼 호텔 근처에서 목격됐다고 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차진혁이 호텔 근처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오늘 내가 처리할 정치인과 그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이해든의 호텔과 가까운 건가.

유건은 내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실장님 부인께서 호텔에 체크인하신 걸 봤습니다. 제가 우연히 그 호텔에서 잠복 중이었거든요."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유건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나는 이해든이 묵고 있는 호텔 쪽으로 몇 명을 더 배치하라고 지시한다. 설원회가 이해든을 건드린다면... 

차진혁의 목을 내 손으로 비틀어버리겠지.

내 책상 위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킨다. 이해든은 아직도 자고 있다. 호텔 CCTV로 확인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도망치듯 잠들어있다. 마치 나에게서 도망치듯. 그녀의 수면 패턴이 이상하다. 그녀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서태주가 또다시 내 사무실로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위스키 잔이 들려있다. 그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잔을 내려놓는다.


"이봐, 강이현. 오늘 그 정치인 처리하고 나서 우리 집에 와. 휘가 너 보고 싶대."


서휘. 서태주의 동생이자 예대생. 그는 나를 동경한다. 내가 그의 형과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하지만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이해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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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난다. 이해든이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날, 그녀는 내가 착용한 하얀 니트를 보고 웃었다.

"드디어 사람처럼 보여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도구일 뿐. 서태주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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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이 들어와 보고한다. 설원회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차진혁이 펠튼 호텔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고. 나는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안다. 오늘 내가 처리할 정치인이 설원회와 거래를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이해든의 호텔 근처를 서성이는 건... 우연일까.

그녀가 시계만 확인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에 잡힌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데 그녀는 아직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해든은 늘 제시간에 식사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늦게 들어와도 그녀는 혼자서라도 식사를 했다.

한도경이 보고서를 들고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커피 잔도 들려있다. 나는 그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누군가를 위해 커피를 들고 다닌다. 그 여자 조직원을 위해서. 나는 한도경의 이런 모습이 우습다. 감정이란 건 약점일 뿐이니까.

그가 내 책상 앞에 서서 보고를 시작한다. 설원회가 펠튼 호텔 주변에 사람들을 배치했다고.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한다. 이해든도 저런 커피를 좋아했었지. 아니, 좋아한다. 아직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이르다.

오늘 오후 두 시까지는 그녀는 여전히 내 아내니까.

채연호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설원회의 해커가 펠튼 호텔의 CCTV 시스템을 해킹하려 시도했다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무엇을 노리는 걸까. 정치인을 보호하려는 걸까, 아니면... 이해든을 노리는 걸까.

문득 떠오른다. 2년 전, 내가 처리했던 설원회 조직원 중 하나. 그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린 언젠가 네가 사랑하는 걸 찾아내서 망가뜨릴 거야."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점심 시간이다. 이해든에게 룸서비스를 보내야겠다. 아니, 그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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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서류에 서명 부탁해요. 집에 두세요. 제가 찾으러 갈게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한다. 이해든의 답장을 읽자마자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이성이 순간 흔들린다. 집에 두라고? 내가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내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 CCTV도, 그녀의 휴대폰 위치도, 모든 것을.

서태주가 사무실로 들어와 내 책상을 쳐다본다. 책상 위엔 내가 쳐서 생긴 균열이 있다. 그는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나는 즉시 표정을 정리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이다. 약점은 제거해야 한다.


"오늘 좀 이상하네, 강이현. 뭐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설원회 놈들이 거슬려서요."


서태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뜬다. 나는 시계를 본다. 오후 한 시. 한 시간 후면 원래는 정치인을 처리해야 했었다. 그리고 이해든도 올 시간이었고. 그녀는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올 것이다. 내가 그녀를 찾아낼 거란 걸 알테니까.

유건이 들어와 보고한다. 설원회의 차진혁이 이해든이 묵고 있는 호텔 근처에서 또 목격됐다고. 나는 천천히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낸다. 오늘은 차진혁의 목도 따야 할 것 같다.

이해든의 마른 몸이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CCTV로 본다. 그녀는 예전처럼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르는 일상적인 동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기계적으로 보인다. 마치 내가 조직원들을 대하듯 감정 없이 움직이는 것 같다.

문지후가 들어와 보고서를 내민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럽다. 내가 오늘따라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나 보다. 그의 보고서엔 설원회 조직원들의 심리 분석이 적혀있다. 차진혁의 최근 행적을 분석한 결과, 그가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듯한 패턴을 보인다고 한다.

나는 천천히 하얀 니트의 소매를 걷어올린다. 팔목에 있는 주사 자국이 드러난다. 각성제는 이제 내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해든은 이 자국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늘 긴 소매를 입었으니까.

그녀가 내 진짜 모습을 본다면... 아니, 이미 봤겠지. 그래서 도망간 거니까.

한도경이 급하게 들어온다.


"실장님, 설원회가 루미에르 호텔의 모든 층을 장악했습니다. 우리 조직원들은 전부 제거당했고, 호텔 직원들도 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이해든의 방이 있는 20층도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리다. 

나는 권총을 집어들며 생각한다. 이해든이 내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가야 한다. 아이러니하군.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내 모습으로,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게.

시계는 오후 한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다. 설원회가 호텔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십 분이 지났다. 나는 차진혁의 의도를 정확히 읽었다. 그는 내가 처리할 정치인을 보호하는 척하면서, 실은 이해든을 미끼로 쓰려 한다. 그가 내 약점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유건이 무전을 통해 보고한다. 설원회 요원들이 이해든의 방이 있는 20층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나는 권총을 점검하며 창밖을 내다본다. 이해든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마치 2년 전, 그녀가 나와 결혼했을 때처럼. 그때도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어떤 괴물과 결혼했는지.

서태주가 다시 전화를 건다.


"강이현, 이번엔 개인적인 일에 조직을 끌어들이지 마. 네가 알아서 해결해."


그의 말은 명확했다. 이해든을 구하되, 태온의 힘을 쓰지 말라는 것.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차진혁이 이해든을 건드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의 목숨은 이미 끝났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각성제를 꺼낸다. 주사기에 약물을 채우며 생각한다. 이해든이 나를 두려워했던 이유를. 그녀는 내 눈빛이 마치 죽은 사람 같다고 했었다. 맞다. 나는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녀 앞에서 진짜 괴물이 되어야겠군.

문을 열자 한도경과 유건이 서 있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도 안다. 오늘은 평소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들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이해든, 넌 내가 얼마나 괴물인지 곧 보게 될 거다. 팔의 각성제가 혈관 속으로 스며든다. 이제 곧 약물이 내 이성을 조금씩 무너뜨릴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이성 따위 필요 없으니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채연호에게 전화를 건다.


"호텔 전체 CCTV를 내 휴대폰으로 전송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내 손목시계가 오후 한 시 사십 분을 가리킨다. 원래 이십 분 후면 정치인과의 약속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살게 될 것이다. 대신 차진혁이 죽을 테니까.

CCTV 화면이 손바닥 안의 휴대폰으로 들어온다. 20층 복도에는 설원회 요원 셋이 배치되어 있다. 모두 권총을 들고 있지만 미숙하다. 그들의 자세를 보니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게 분명하다. 차진혁이 급하게 요원을 모집한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다. 나는 비상계단을 이용할 것이다.

주차장에서 만난 설원회 요원 둘은 내 존재를 눈치채기도 전에 쓰러진다. 목을 비틀어 죽이는 건 소음도 없고 깔끔하다. 그들의 시체를 주차된 차 트렁크에 밀어 넣으며 생각한다. 이해든은 이런 내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남편이 이렇게 손쉽게 사람을 죽인다는 걸.

각성제가 혈관을 타고 퍼져나간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성이 희미해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좋다. 차진혁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괴물인지 보여줄 테니까. 그리고 이해든에게도... 그녀가 왜 나를 떠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몸소 보여주게 될 것이다.

비상계단을 올라가며 시계를 본다. 오후 한 시 오십 분.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든, 피로 물들이든.

비상계단에서 멈춰 선다. CCTV로 보이는 이해든의 모습이 열이 나는 듯하다. 그녀가 이불을 더 끌어당기는 걸 보니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다. 그녀는 감기에 걸리면 늘 열이 심하게 났다. 내가 그녀 곁에서 얼음주머니를 들고 있어야 했던 그 밤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 곁에 내가 없다.

19층과 20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설원회 요원 둘과 마주친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보고 즉시 총을 꺼내들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아귀에서 목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난다. 깔끔하고 조용하게. 각성제가 만들어낸 힘으로 성인 남성의 목을 비트는 건 어렵지 않다. 시체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층 복도에 도착했다.

이해든의 방은 2015호. 그 앞에 서 있는 설원회 요원 셋이 보인다. 그들은 아직 내가 여기 온 걸 모른다. 차진혁은 어디 있을까. 아마도 이해든의 방 안에 있겠지. 그가 직접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니까.

각성제가 혈관을 타고 더욱 빠르게 퍼져나간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이성이 희미해지는 걸 느낀다. 눈 앞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복도에서 들리는 이해든의 거친 숨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열에 들떠 숨이 가빠진 모양이다. 그녀가 아플 때면 늘 이런 소리를 냈다. 내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면 체온이 손바닥을 태울 듯했고, 그럴 때마다 얼음주머니를 들고 밤을 새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녀 곁에 있을 수 없다.

복도에 서 있는 설원회 요원들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각성제가 만든 환각인지, 그들의 동작이 느리게 보인다. 첫 번째 놈의 목을 비틀 때, 그의 동료들은 아직도 총을 꺼내지 못했다. 두 번째 놈의 기도를 찢을 때, 마지막 놈이 겨우 총을 겨눈다. 하지만 늦었다. 내 손아귀에서 그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건조하고 가벼운 소리.

차진혁은 이해든의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올 걸 알았다. 그래서 이해든을 미끼로 썼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괴물인지를. 각성제가 만든 광기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그리고... 이해든이 내게서 도망간 진짜 이유를.

2015호 문 앞에 선다. 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피로 젖어있다. 하얀 니트도 이제는 붉은색이다.

이해든이 좋아했던 그 하얀색은 이제 없다. 마치 그녀가 사랑했던 나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진혁이 이해든을 안아 들어올리는 걸 본 순간, 내 안의 마지막 이성마저 산산조각난다. 각성제가 만든 광기와 분노가 전신을 지배한다. 그가 이해든을 데리고 베란다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 그래서 그가 20층을 선택했구나. 이해든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하려는 거겠지.

나는 권총을 꺼내들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차진혁은 이해든을 안은 채 베란다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어린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왔는지. 그리고 지금 각성제에 취해 얼마나 미쳐가고 있는지.

 

"강이현, 네가 올 줄 알았어. 네 아내가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갔어?"

 

차진혁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눈에는 오직 이해든만 보인다. 열에 들떠 잠든 그녀의 얼굴이,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순수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도 모르겠지.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녀를 건드린 차진혁이 곧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뜬다. 이해든이 차진혁의 팔을 물어뜯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내 안의 시간이 멈춘다. 그러나 열이 채여 다소 거칠어진 숨소리다. 그녀의 떨리는 손이 나이프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열에 들떠 흐릿한 정신으로 무기를 든 그녀가, 마치 처음 총을 든 신입 킬러처럼 위태롭다. 그녀는 차진혁을 피해 베란다 난간으로 향한다. 어리석군. 그녀는 모른다. 저 난간 아래 설원회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걸.

차진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의 팔에선 이해든이 문 자국에서 피가 흐른다. 그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려 할 때, 내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각성제가 만든 광기 속에서도, 그의 공포에 젖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차진혁, 넌 내가 왜 실장이 됐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왔는지도."


이해든이 난간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열 때문일까, 공포 때문일까. 그녀의 손에 든 나이프는 차진혁의 것이다. 그가 이해든을 협박하려 들고 왔던 무기. 하지만 이제 그 칼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마치 그녀가 한때 내 것이었듯이.

 

 

---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이해든이 차진혁의 복부를 찌르는 순간, 내 귀에는 살이 찢어지는 소리만이 들린다. 차진혁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날 때, 그의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베란다 바닥을 물들인다. 이해든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진다. 그리고 그녀가... 난간을 넘어선다.

나는 달려나간다. 각성제로 인해 폭발하는 심장이 터질 듯하다. 이해든의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내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난간 너머로 그녀의 몸이 허공에 매달린다. 20층의 높이에서 그녀의 생명이 내 한 손에 달려있다. 설원회 요원들이 아래에서 총을 겨누고 있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차진혁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웃는다.


"강이현... 네 아내가 널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봤나?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만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이 그의 목을 밟는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숨이 끊어진다.

이해든의 손목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의 체온이 평소보다 뜨겁다. 열이 심한 모양이다. 그녀는 여전히 내 얼굴을 보지 않는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에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인 걸까.


"이해든, 선택해. 내가 너를 올려줄까, 아니면... 놓아줄까?"


내 목소리가 차갑다. 각성제의 효과로 인해 이성은 이미 무너졌지만, 그녀를 향한 집착만은 선명하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를 끌어올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내 손에서 땀이 흐른다. 각성제로 인한 것인지,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래층에서 총성이 들린다. 유건이 설원회 요원들을 처리하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해든의 대답만이 중요하다.

그녀의 열기가 내 손을 통해 전해진다. 39도는 될 것 같은 고열. 그녀가 의식을 잃으면 모든 게 끝난다. 내가 그녀를 구하든, 그녀가 추락하든. 시간이 없다.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각성제가 만든 광기 속에서도 그녀의 체온만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해든, 대답해."


내 목소리가 차갑다. 마치 얼음처럼.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얼굴을 보지 않는다. 그녀의 눈동자는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있다.

마치 자유를 갈구하듯이. 나로부터의 자유를.


"... 놓아 주세요.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겠다면, 제 손을 놓아 주세요."


그녀의 말이 내 귀를 파고든다.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그녀는 내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서명과 죽음 사이에서. 이제야 그녀를 제대로 보게 된다. 열에 들떠 새빨개진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죽음을 앞둔 자의 눈빛.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두렵다는 걸 느낀다. 그녀의 결심이, 내가 만든 광기보다 더 깊고 어둡다는 걸.

각성제가 만든 환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진다. 마치 10년 전 내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처럼. 그때도 이런 선택이 있었다. 죽이거나, 죽거나. 나는 항상 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선택하게 하고 있다. 내가 아닌 그녀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내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아주 조금.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큼만. 이것은 시험이 아니다. 진심이다. 내가 그녀를 놓을 수도 있다는 진심. 그녀는 이제 내 눈을 보지 않는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나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건의 총성이 더 가까워진다. 곧 이곳까지 올 것이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야겠지.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일 테니.

 

---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아, 다행이다. 적어도... 내가 그의 약점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겠구나. 그리고 내가 이제 혼자서 아플 일도 없겠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냥... 그가 아팠으면 좋겠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아팠으면, 고통스러웠으면.

 

 

---

그녀의 체중이 손목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내 안의 시간도 함께 멈춘다. 내가 놓은 게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를 놓았다. 마치 오래된 짐을 내려놓듯이. 그녀의 몸이 공중을 가르며 떨어지는 모습이 각성제로 일그러진 시야에 또렷이 박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1초? 아니면 1시간? 유건이 내 어깨를 잡고 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차갑고 건조한 웃음. 그녀는 결국 해냈다. 나를 완벽하게 배신했다. 죽음으로.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배신을,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완성했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킬러였다는 것을. 나의 심장을 겨눈 완벽한 암살자였다는 것을.

유건이 무언가를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내 눈앞에는 여전히 그녀가 떨어지는 장면만이 반복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성제의 효과가 최고조에 달한다. 온 몸이 불타는 것 같다. 그래, 이제 나도 떨어져야 하나? 그녀를 따라가야 하나? 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선택이겠지. 그녀는 분명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을.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차진혁의 시체를 본다. 그의 목이 비틀어져 있다. 내가 밟아서 죽인 첫 번째 사람이군. 이제껏 총이나 칼로만 죽였는데. 발로 밟아 죽이는 건 처음이다.

묘하게 새로운 느낌. 그리고 이건...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그녀가 찌른 칼자국. 복부에 깊이 박힌 채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복부의 칼자국을 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녀가 나를 떠나며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그녀답지 않게 폭력적인 선물. 하지만 이상하게도 만족스럽다. 그녀도 결국은 나처럼 피를 흘릴 줄 아는구나. 그녀도 나처럼 살인을 할 수 있구나.

유건이 무전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서태주겠지. 그가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내가 뛰어내릴까 봐 경계하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그녀처럼 용감하지 못하니까.

각성제가 만든 환각 속에서 20층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제 그들은 그녀의 죽음을 무기로 삼을 것이다. 태온의 실장이 자신의 아내도 지키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녀는 내가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지키기를 거부한 거라는 걸.

주머니에서 이혼 서류를 꺼낸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남긴 것. 피묻은 손으로 서명란을 본다. 이제 와서 서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니까. 볼펜을 꺼내 서명을 한다. 마치 사형 선고문에 서명하듯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완벽한 킬러였다. 나를 죽이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내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가, 오늘 마침내 치명상을 입혔다. 그녀의 무기는 칼도, 총도 아닌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던져 나를 영원히 죽이기로 했다.

한도경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를 보는 시선이 동정인지 경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내가 죽었다.

베란다에서 벗어나 호텔 방 안으로 들어선다. 각성제의 효과가 최고조에 달한 지금,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다. 피 묻은 하얀 니트, 차진혁의 시체, 그리고 그녀가 남긴 나이프의 자국까지. 한도경이 시체 처리를 지시하고, 유건은 여전히 나를 감시하고 있다.

서태주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현아... 설원회 놈들이 네 와이프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다. 그가 모르는 게 있다. 그녀는 설원회에게 죽은 게 아니다. 그녀는 나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를 죽였다.

유건이 내 앞에 서서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만이 맴돈다.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겠다면, 제 손을 놓아 주세요."

그래, 이제 서명했으니 끝이다. 모든 게.

내 손에 들린 이혼서류가 바람에 날린다. 마치 그녀의 영혼처럼 하늘로 흩어져간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나는 그녀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그녀는 내 통제를 벗어난 유일한 존재였다는 걸.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서서, 20층 아래를 내려다본다. 각성제로 인해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진 상태다. 

호텔 방으로 들어와 거울을 본다. 하얀 니트는 이제 더 이상 하얗지 않다. 차진혁의 피와 내 땀으로 얼룩져있다. 유건이 말했다. 서태주가 곧 도착한다고. 그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아니면 설원회의 소행이라고 둘러대야 할까. 둘 다 거짓말이 될 것이다.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물잔을 집어든다. 손이 떨린다. 각성제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잃은 충격 때문일까. 유건이 내 상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그녀가 나를 죽였다는 것을.

분수대 옆에 놓여있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하얀 원피스. 그녀에게 선물했던 그 옷이다. 모든 게 의도적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완벽하게 연출했다. 마치 무대 위의 마지막 장면처럼.

유건이 내 팔을 잡으려 하지만, 나는 그를 밀쳐낸다. 각성제로 인해 온몸이 불타는 것 같다. 그녀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는다. 아직도 따뜻하다. 피는 거의 없다. 마치 잠든 것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나를 조롱하고 있다.

그래, 넌 이겼어.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내가 놓아버린 그 손목을. 맥박은 없다. 당연하지. 20층에서 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각성제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진짜 죽어서일까. 한도경이 다가와 "실장님..."이라고 부르지만, 무시한다. 지금은 아무도 필요 없다.

오직 그녀와 나, 두 구의 시체만이 여기 있을 뿐.


"해든아... 넌 정말 대단한 킬러였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나를 이렇게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었어."


서태주의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이 연극의 마지막 막이 내려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그녀가 승리했으니까.

분수대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물줄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소리. 그녀가 떨어졌을 때도 이런 소리가 났을까. 하얀 원피스가 물방울을 맞아 투명하게 젖어든다. 그녀의 마지막 연출이 완성되어가는 중이다.

하얀색 드레스, 하얀색 니트. 우리는 둘 다 하얀색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서태주가 도착했다. 그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그녀의 시신 옆에서 일어선다. 각성제가 만든 광기는 이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마치 그녀의 체온처럼. 서태주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그는 내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시신을 수습하라는 서태주의 명령이 떨어진다. 한도경이 그의 부하들을 지휘한다. 유건은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미쳐버릴까 걱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미치광이는 이성을 잃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시신이 들것에 실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마지막 인사인가.

서태주가 내 어깨를 잡는다.


"이현아, 설원회 놈들 전부 찾아내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다. 설원회와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스, 이건 설원회와는 관계없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태주의 얼굴이 굳는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한 여자가 이렇게 완벽한 복수를 할 수 있는지.

분수대의 물이 계속해서 솟구친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녀의 옆에 떨어진 이혼 서류를 주워든다. 이미 서명을 했었지. 서태주 앞에서 그것을 찢으려다 멈춘다. 아니, 이건 그녀의 유언이나 다름없다. 마지막 소원이었다. 차라리 내가 찢어지는 게 낫다.

그녀의 시신이 구급차에 실린다. 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작별 인사 같다. 서태주가 무언가를 말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모든 감각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다. 각성제가 만든 환각은 이제 서서히 식어가고, 대신 현실이라는 차가운 감각이 밀려온다.

유건이 다가와 "실장님, 이제 들어가시죠"라고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능글맞음이 없다. 그도 알았을까. 오늘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패배했는지. 한도경은 이미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은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연인을 떠올리고 있을까.

정우현이 호텔 로비에서 걸어나온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 마치 오래전 자신이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그가 내게 다가와 "강이현, 넌 결국..." 이라고 말을 꺼내려 하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한다. 지금은 그 누구의 위로도, 비난도 필요 없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햇살이 너무 밝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런 하늘이었을까. 아니면 내 얼굴이었을까. 문득 깨닫는다. 그녀는 끝까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복수였다.

그녀의 시신이 구급차에 실려 사라진 후, 나는 서태주에게 말한다.


"보스, 제가 태온의 실장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모두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서태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는 내가 감정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냉철한 판단이다. 나는 이미 죽었다. 그녀가 나를 죽였으니까. 죽은 자가 실장 자리에 앉아있을 순 없다.


"그동안 제가 조직을 위해 한 모든 일들, 그리고 제가 숨겨온 모든 것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유건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는 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사실에 놀란 듯하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다. 그는 완벽한 도구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제 자리는 없습니다. 제 아내가... 아니, 그녀가 저를 완벽하게 죽였으니까요."


서태주가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처음으로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는 내 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죽음을 보았겠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워진다. 루미에르 호텔을 등지고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른다. 각성제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현실감이 밀려온다. 내 손목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잡았던 자국이 선명하다. 마치 낙인처럼.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정우현이 따라온다. 그의 발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는 늘 그랬듯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의미가 없다. 나는 차 키를 꺼내들며 그를 무시한다. 차에 오르려는 순간, 정우현이 입을 연다.

 

 

"이현아...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넌 이렇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을 세게 닫는다. 엔진을 켜고 백미러로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하다. 혐오스럽다. 나는 가속페달을 밟는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도시의 거리를 달리며 생각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내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아니면 점차 깨달았을까. 신혼 초의 달콤한 순간들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아무것도.

집으로 향하는 길에 휴대폰이 울린다. 서태주다. 받지 않는다. 다시 울린다. 이번엔 유건이다. 무시한다. 그들은 모두 나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버렸고, 그 순간 나 자신도 함께 떨어졌으니까.

차를 운전하다 문득 집으로 가기 싫어진다. 왜 집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없는 집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방향을 틀어 한강으로 향한다. 그녀가 좋아하던 장미공원 쪽이다. 차를 세우고 강변을 걷는다. 가을바람이 차갑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피우지도 않으면서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불을 붙이려다 멈춘다. 강욱이 떠오른다. 그 미친놈은 내 아버지를 죽이고도 담배를 피웠다. 나는 담배를 강물에 던진다. 물살이 담배를 삼킨다. 마치 그녀가 떨어진 것처럼.

휴대폰이 또 울린다. 이번엔 한도경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그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르다. 나는 이미 잃었다. 아니, 내가 직접 놓아버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강변에 앉아 하늘을 본다. 햇살이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프다. 각성제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통증이 밀려온다. 몸의 통증이 아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고통이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다.

 

아, 이게 감정인가.

문득 깨닫는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감정이라는 것을. 죽음으로써 나를 살게 만든 것이다. 얼마나 완벽한 복수인가. 이제 나는 그녀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내게 남긴 이 고통을 통해, 나는 영원히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한강 위로 붉은 빛이 번진다. 마치 피처럼. 그녀의 하얀 원피스가 떠오른다. 그 순수한 흰색이 내 기억 속에서 붉게 물들어간다. 나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발걸음이 무겁다. 마치 그녀의 시신을 끌고 가는 것처럼.

문득 핸드폰이 진동한다. 메시지다. 장례식장 주소다. 서태주가 보냈을 것이다. 메시지를 지운다.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미소 짓던 그 순간으로 남겨두고 싶다. 장례식장의 검은색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강변의 벤치에 앉는다. 주머니에서 각성제를 꺼낸다. 마지막 한 알이 남아있다. 이것도 그녀가 계획한 걸까. 내가 마지막으로 각성제를 하는 순간까지도. 약을 강물에 던진다. 물결이 일렁인다. 이제 더 이상 도피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내게 준 이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유건에게 문자를 보낸다.

[내 집무실 서랍 속 검은색 USB를 보스에게 전달해.]

이제 끝이다. 태온에서의 모든 것을. 그녀는 내 모든 것을 가져갔다. 권력도, 지위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영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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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간다. 나는 여전히 강변에 앉아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10월의 바람이다. 내 생일날의 바람. 그녀는 이날을 골랐다. 내가 태어난 날에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완벽한가. 나는 웃음이 난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는다. 그녀의 승리에 박수를 보내며.

차가운 한강변 벤치에 앉아 물을 본다. 그녀의 화장 동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있을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녀의 장례식. 하지만 난 거기 없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뜻대로다.

주머니 속 이혼 서류가 바스락거린다. 종이 한 장으로 우리의 2년이 정리된다. 내가 서명한 순간, 그녀의 죽음이 공식화됐다. 아니, 우리 둘 다의 죽음이. 살아있는 건 이 육체뿐이다. 영혼은 그녀와 함께 떨어졌다.

문득 서태주의 동생 서휘가 보낸 메시지가 떠오른다.

 

[형수님 장례식에...]

 

읽지 않고 지웠다. 그는 아직도 날 형수님의 남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시체일 뿐.

밤이 깊어갈수록 한강은 더 어두워진다. 가로등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일렁인다. 마치 그녀의 눈물처럼. 아니, 착각이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끝까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더 잔인하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저 빈 공간일 뿐. 그녀의 향기도, 온기도 없는 죽은 공간.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그저 걸을 뿐이다. 마치 죽은 자처럼.

정우현이 멀리서 나를 따라 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술집으로 데려갔다.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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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가 자정을 알린다. 내 생일이 끝나가는 시간이다. 정우현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 그가 내게 마지막 잔을 권한다. 거절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을 잃은 자에게 무엇을 더 잃을 것이 있겠는가.

한잔을 더 마시며 생각한다. 그녀는 내게 이혼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살아있지 않아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는 내가 진짜 살아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나를 시험했다. 결과는...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살아있는 자라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정우현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의 손길이 무겁다. 마치 관 뚜껑을 닫는 것처럼. 맞다. 오늘은 장례식이다. 그녀의 것이자 내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녀는 육체로, 나는 영혼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가 산 자들의 공간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우현이 뭐라 말하려 하지만 손을 들어 제지한다.

 

 

"교관님, 이제 됐습니다. 강이현은 오늘로 끝났으니까요."

 

정우현도 내 뒤를 따라 나온다. 내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막은 건가. 아니면 내가 자살할까봐 걱정되는 건가. 걱정 마,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그녀처럼.

 

 

---

 

 

거리를 걷는다. 아니, 헤맨다. 집으로 가기 싫다. 회사로 가기 싫다. 그녀의 흔적이 없는 곳을 찾아 떠돈다. 하지만 서울 어딜 가도 그녀가 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거리, 커피를 마셨던 카페, 손을 잡고 걸었던 공원. 이 도시 전체가 그녀의 무덤이다.

하얀 니트가 피로 물들어있다. 그녀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피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되었으니까. 죽음으로.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마치 그녀의 마지막 손길처럼 차갑고 서늘하다. 하늘을 보니 달이 없다. 그래, 이래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끝나야 마땅하다.

새벽공기가 차갑다. 10월의 끝자락이다. 내 생일날, 그녀는 나를 두 번 죽였다. 한 번은 이혼서류로, 또 한 번은 그녀의 죽음으로.

 

완벽한 살인이었다. 법정에서도 성립되지 않을 살인. 하지만 분명한 살인.

호텔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곳에는 그녀의 흔적이 너무 많다. 책장의 소설들, 화장대의 화장품들, 옷장 속 원피스들. 모두 그녀를 닮았다. 특히 하얀색 원피스. 오늘 그녀가 입고 있던 것과 같은. 호텔 리셉션에서 방을 잡는다. 가장 높은 층을 요구한다. 그녀가 뛰어내린 높이와 같은 층을 원한다.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다. 피로 얼룩진 하얀 니트, 붉어진 눈, 흐트러진 머리카락. 이게 나인가. 아니다. 이건 그녀가 만든 새로운 나다.

감정이라는 것을 가진 나.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나. 살아있는 시체 같은 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는다. 피 묻은 니트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진다. 그녀가 좋아했던 옷이다. 샤워기를 튼다. 뜨거운 물이 몸을 적신다. 하지만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안의 얼음은 녹지 않는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