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계절을 거슬러 그 날처럼 마주 서 있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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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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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junk

 

 

*뤼튼 플레이로그*
: 하설영 일대일 @imnothuman 
: 일부 수정 및 각색
 
 
 

 
* 추천 BGM *
: SS501 - 바라보며 (Original Ver.)

: 김유경 - 별빛 눈물

: DAY6 -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Afraid, Healer, Man in a movie 

: WOODZ - 해가 될까

: ITZY - Imaginary Friend

: 오마이걸 (OH MY GIRL) - Classified

 

 

 

---

 

 

 

그들은 크리스마스날, 멍하니 고층 건물 스크린에서 나오는 뉴스를 본다. 소행성 충돌이라니.

 

갑작스레 모두가 7일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이를 보다가 제 옆에 있는 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하설영 또한 스크린을 보고 있다. 

“... 거짓말이겠지, 설마.”


[현재 시간: 12월 25일 오후 3시 27분]
[D-6 20:33:00 until impact]


그는 멍하니 스크린을 보고 있다. 그의 유리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린다. 대형 스크린 속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소행성 충돌 속보로 인해 흐려진다. 하설영의 연갈색 눈동자에 번쩍이는 빨간 긴급 뉴스가 반사되고 있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에 하설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의 희디 흰 피부가 붉은 조명을 받아 살짝 물든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단 한 마디의 말도 필요 없다는 듯,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한다.

 

"이해든 씨."

 

2년간 하설영의 곁에서 비서로 일한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이런 차분한 목소리는 보통 자신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렸을 때 나온다는 것을. 그녀가 숨을 죽인다.

 

"조금만 걸을까요?"

 

스크린이 있는 광장을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걸어간다. 하설영의 차분한 발걸음이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친다. 마치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도 고요하게 걷고 있다.

그들이 어느덧 도착한 곳이 '이가은'의 납골당이라는 걸 깨닫는다. 하설영이 일 년에 한 번만 찾는다는 그곳. 하설영은 평소와 다르게 납골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도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어둔다.

그녀는 그의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린다. 그녀의 표정이 무언가 말하려다 마는 듯하다.

 

지금... 나를 데려온 곳이, 이가은의 납골당이라는 건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는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낮게 묶어 올린다.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그를 따라 납골당 안으로 들어선다. 찬 바람이 들어와 문을 닫는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에 고고하게 피어난 꽃처럼 그는 서 있었다. 이가은의 자리 앞에 말이다.

 

일 년에 한 번 찾는 곳, 그렇지만 이제는 못 올 테니까. 일주일 뒤에는 우리 모두가... 그녀의 곁에 있을 테니까. 그래, 그렇다면 그는 지금 상황이 반가울까? 아니면, 그냥 그럴까 궁금하다.


"... 7일 남았는데, 가장 먼저 가신 곳이 이가은 씨의 납골당이라니. 실장님 답네요. 여기 오신 이유가 있으세요?"


그녀는 그에게 질문을 하고도 스스로가 어이가 없는지 픽 웃는다.

 

왜 왔겠냐고, 보고 싶으니까 왔겠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녀가 그의 비서로 일을 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는 이가은의 영정사진을 보며 제 자신의 무게를 가늠했다. 이가은의 검은 동공이 늘 그렇듯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눈빛은 그게 '이제야 왔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제야 하설영은 그가 그녀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가은의 얼굴에 스며든 고요함이 마치 소행성 충돌이라는 현실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이해든의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해든의 목소리엔 묘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이 가진 의미를 가만히 곱씹어본다.

이해든이 하설영을 2년간 지켜보았듯, 그 또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강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의 비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알아야 할 것 같군요."


하설영의 손이 천천히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꺼낸 건 오래된 편지 한 장이었다. 이가은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긴 편지다. 그는 그 편지를 그녀에게 건넨다.


"이가은을 내가 죽였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납골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해든의 표정이 오묘하다. 하설영은 그녀의 반응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국정원의 명령이었죠. 그녀의 가문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결국 선택은 제가 한 것이니까요."


그녀는 그가 건넨 편지를 아무 말 없이 받아 들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국정원의 명령으로 이가은을 죽였다는 그의 말이 어딘가 공허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알아야 한다고? 내가 왜, 당신이 이가은을 죽인 것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리고 그가 국정원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는 몰랐다. 그래, 죽기 직전에 고해성사를 하고 싶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상대가 왜 나여야 하는 걸까.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저의가 궁금합니다. 실장님이 지금까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건, 숨기고 싶어서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게 이야기를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니면... 그게 누구라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신가."


이해든은 그가 건넨 이가은의 마지막 편지를 천천히 열어 내용을 읽어본다.

 

그녀는 알았을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손에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것이라고.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누가 더 불쌍하고 안타까운지 줄을 세우는 건 무의미하지 않을까,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죄를 씻어내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해든의 질문이 날카롭게 하설영의 심장을 파고든다. 그녀의 말대로다. 그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숨겨왔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고해성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역시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해든이 편지를 읽는 동안, 하설영은 그녀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의 죄를 재단하는 심판관처럼.


"당신이라서 말한 겁니다."


하설영의 목소리가 납골당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린다. 이해든은 여전히 편지를 읽고 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아마도 이가은의 마지막 글자들이, 그녀의 마지막 숨결이, 이해든의 손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신은 내 곁에서 많은 것을 보았을 겁니다. 내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감정한 사람인지.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가은의 영정사진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하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강욱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내게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고 있었겠죠. 나는... 강욱보다 더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그의 새로운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라도 했을까.

그의 말이 맞다고 이해든은 생각한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든 그가 처음 그녀에게 말을 했던 것처럼,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을 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선을 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녀의 손에 쥐어진 이가은의 마지막 편지에 적힌 말들이 꽤나 날카롭게 그녀에게 꽂힌다. 누군가를 탓하는 내용도, 저주를 하는 내용도 아니지만 이렇게 무겁게 와닿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의 손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어간 그녀가 떠올라서? 사랑하는 그녀를 제 손으로 죽이고 긴 시간 스스로를 가둔 그가 안타까워서? 그게 아니라면...


"두 분이서 꽤 많이, 사랑하셨나 보네요. 저를 이 납골당에 데려오고 이가은 씨의 편지를 손에 쥐어준 이유는 두 분이서 얼마나 열렬한 사랑을 했는지 제가 알았으면 해서인가요? 실장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제게 하실 정도로요?"


이해든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내가 왜 이렇게 그의 이야기에 날을 세워 받아치고 있을까.

 

그녀는 속에서 차오르는 감정들 때문에 혼란스럽다.


"실장님이 국정원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약혼을 한 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습니다. 특정한 날에 자리를 비우시는 것을 보고, 그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던 거고요. 냉정하고, 무감정한 사람... 맞아요, 실장님 그런 사람이에요. 실장님은 강욱 팀장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거 보니까... 지금 이렇게 하시는 거겠죠. 왜요? 이가은 씨에게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게라도 용서를 받고 싶으셨나요?"


이해든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날카롭다. 그녀의 말대로다. 그는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이가은에게서 받지 못한 용서를, 이해든에게서 구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죽음을 앞두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건 그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다. 하설영은 그 안의 복잡한 감정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가은을 죽인 것을.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겁니다."


그는 천천히 이가은의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가은의 미소가 여전히 따스하게 그를 비춘다. 그 미소는 아직도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나를 이해하길 바랐던 것 같군요. 왜 내가 이토록 차갑고, 왜 이토록 거리를 두는지. 그리고 왜 당신이 내게 다가오려 할 때마다 내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절했는지를."


하설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그래,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가은이 싫어했으니까.

죽은 그녀를 위해 끊은 담배를. 그녀가 죽고 나서도 피우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자기 징벌이었을까.


"이해든 씨. 당신은 내게 다가오려 했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건 내가 가진 죄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녀는 그가 용서받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해든은 하설영의 곁에서 2년을 버텨냈다. 그녀는 강욱에게서 도망쳐 왔지만, 결국 더 위험한 존재인 나를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은 비슷했어요, 이가은과. 순수했고, 정직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이 나를 선택했다는 게, 나는 두려웠습니다. 이가은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언젠가는 내게 배신당할 테니까요. 당신이 나를 이해하길 바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당신이 나를 두려워하길 바랍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내가 당신을...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을 하며 하설영은 이해든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그의 모습이 보인다. 차갑고 위험한 존재. 그것이 바로 하설영이다.

이해든은 손에 쥐고 있던 이가은의 편지를 그의 손에 다시 돌려준다.

 

이걸 나에게 보여준 이유가... 내게서 그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녀는 그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이가은의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일으켜 세운다.


"바닥 차요. 일어나세요, 실장님.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실장님이 가진 죄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이해든의 손길이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킨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그녀의 손길이 묘하게 따스하다고 느꼈다. 그 온기가 그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설영은 받을 자격이 없는 온기라 생각하니까.

당신이 지금 한 말은 나에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갖게 했다.
시작은 강욱을 피해 그의 비서직을 지원한 것이 맞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왜 아직 그의 곁에 남아 있을까. 일주일 뒤면 소행성이 충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를 놓고 떠나도 됐을 텐데.

하물며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도 제 손으로 거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툭 내뱉는다.


"... 만약에요. 소행성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런 상황이 오면 실장님은 절 죽이실 건가요? 그때처럼?"


그녀가 던진 질문이 공기를 날카롭게 가른다. 이해든의 말은 마치 독약을 품은 꽃처럼 아름답고도 치명적이었다.

'절 죽이실 건가요?' 그 말에 하설영은 잠시 숨을 멈췄다. 이해든은 하설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죽일 수 있습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차갑게 내뱉은 말이지만, 그 심장은 이상하게 뛰고 있다. 그녀의 시선이 그를 꿰뚫는다.


"하지만 그런 명령이 내려진다면, 이번에는 다르게 하겠습니다. 당신을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테니까요."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이가은을 죽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이해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해치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제 모습이 낯설다. 목소리가 흔들린다. 하설영이 처음으로 보이는 동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이해든의 얼굴을 감싼다. 그녀의 피부는 차가웠다. 아니, 어쩌면 그의 손이 차가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처음으로 하설영의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이가은을 죽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이렇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


"당신이 이가은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당신은 이가은과 전혀 다릅니다. 이가은은 순수했고, 나를 전적으로 믿었죠. 하지만 당신은... 나의 본질을 알면서도 선택했습니다. 그런 당신을 어떻게 이가은처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나를 두려워하길 바랐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물러나주길 바랐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리고 그녀가 던진 질문. 그녀를 죽일 수 있느냐고.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고요? ... 아니오.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다가올 때마다 내가 거리를 둔 건, 당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이가은은 내가 사랑했기에 죽였지만... 당신은, 당신은 내가 사랑하기에 살려두고 싶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입니다. 이제 7일 후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요. 그래서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는 놀란듯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감정으로 덧칠되어 쏟아지는 그의 말들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를 죽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이 먼저 죽겠다고? 아니, 애초에 나를 죽일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당신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볼을 감싼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이해든은 알아차린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도록 내버려 둔다. 그녀는, 그가 밀어낼 때마다 계속해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선을 넘지는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사랑했기에 죽였다는 그의 말이 왜 이렇게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다.

 

"... 실장님, 진심이에요? 지금 소행성이 다가와서 우리 모두가 곧 죽을 운명이니까, 아무한테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길다면 긴 시간, 그와 함께 지냈기에 그를 알고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녀가 그의 곁에서 비서로 일을 한 지 2 년이니까, 그 정도는... 그러나 그의 오랜 마음, 죄책감으로 꽁꽁 묶인 사람.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그는 그녀를 죽일 수 없다.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인가 보다. 그가 말한 이 한 문장으로 정신없던 그녀의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해든은 그가 고개를 돌려 이가은의 자리를 쳐다보는 것을 말없이 바라본다. 잊으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 기억은 하설영, 그의 몫이니까.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의 손을 잡아 납골당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끄는 순간, 차가운 납골당의 공기가 끊어진다. 이가은의 영정사진이 점점 멀어진다. 그녀의 미소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옭아매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오랫동안 그를 붙잡고 있던 쇠사슬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마치 이가은이 그들을 보내주는 것 같다.

 

주변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울음, 비명, 웃음소리들이 섞여 흘러들어온다. 바깥의 소음이 그들의 귓가를 스친다. 하설영은 이해든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사이로 하얀 목덜미가 드러난다.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진다. 

 

살아있다는 증거. 아직 우리는 살아있다. 그 온기가 낯설었다. 그 손길이 따뜻하다. 나는 이 온기를 거절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마치 오랫동안 얼어있던 얼음이 봄날에 녹아내리듯, 그의 차가운 심장이 그녀의 온기에 녹아내리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은 건 언제였을까. 아마도 이가은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이해든이 내 손을 잡고 있다. 그녀의 손이 차갑다. 크리스마스의 찬 공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방금 한 고백 때문일까.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해진다. 내 눈앞에는 오직 이해든뿐이다.

 

저 멀리 주차되어 있는 차가 보인다. 그녀는 차로 걸어가며 그에게 약간은 잠긴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본부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저랑 바다라도 보러 가실래요?"

 

바다. 나는 이가은과 처음 만났던 곳도 바다였다. 그때 그녀는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웃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홀려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 이해든이 제안한 바다는 다르다. 그곳은 이가은의 바다가 아닌, 이해든만의 바다일 것이다.

그녀의 제안이 그에게 의외로 달콤하게 들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녀와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 그는 스스로가 이런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정리한다. 하설영은 이해든을 원한다. 그리고 그녀도 그를 원한다는 것을.


"바다로 가죠."


이 대답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7일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전까지, 단 7일만이라도 그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차에 오르며 그는 문득 생각한다. 이가은이 죽은 뒤로 그는 늘 검은색 수트만 입었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회색 수트를 입었다. 마치 그가 무의식적으로 이날을 준비했던 것처럼.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해든은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옆모습이 차창에 비친다.

이해든이 내 고백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지난 2년간 그녀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열어보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소행성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녀에게 더 일찍 말하지 않은 것을. 그녀를 더 일찍 안지 않은 것을.

그는 그녀가 내 고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해든 씨. 당신이 맞습니다. 나는 죽음이 다가와서 고백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죽음이 임박했기에, 비로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더 이상 차갑고 무감정한 실장이 아닌, 그저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준 2년이... 내게는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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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간: 12월 27일 오전 7시 15분]
[D-4 19:45:00 until impact]

 

 

 

내가 당신의 구원과도 같았다는 말은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했다. 우리의 사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그 말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다가오는 종말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

소행성이 충돌하기까지 겨우 이틀이 남았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매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서로를 떠올리며 채워나갔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것을 남길 수 있을까.

세상이 망한다는 뉴스가 나온 이후,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출근? 당장에 죽게 생겼는데, 출근이 무슨 대수인가. 그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여기기로. 이제 이제 4일이 남았다. 어떻게 보내야 할까라는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도 아까우니까.


이가은의 납골당에서 나와 바다를 보러 간 이후, 나는 짐을 챙겨 그의 아파트로 들어왔다. 그냥, 그가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까. 하루 종일 그와 요리를 하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풍경을 보며 잠에 들고 일어나고... 소행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을 정도였다.


"실장님, 혹시요. 아니다, 아니에요. ... 까먹었어요."


문득 생각이 난 질문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려다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든다. 까먹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호칭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태온 밖에서도 실장님이라고 하는 게 맞나, 싶어서. 그리고 그를 실장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웃음을 짓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며 머리를 올려 묶는다.


"혹시 배고파요? 아침... 뭐 먹을래요? 아니면, 다른 거 찾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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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든이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다 다시 묶여 올라간다.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비춘다. 나는 그 순간 이가은을 떠올린다. 이가은도 저렇게 머리를 올려 묶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가은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하게 바래져간다.

우리의 삶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세상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평온했을지도 모른다. 이해든이 내 집으로 들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가은이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지워버렸다. 이해든은 이해든일 뿐이다. 그녀는 이가은의 대체품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지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실장님'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미세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감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도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자격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묘하게 붉다. 마치 우리의 운명을 예고하듯.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이미 혼돈에 빠져있다. 약탈, 살인, 폭력. 인류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내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뚫고 나간다. 나는 천천히 부엌으로 향한다. 이해든의 등 뒤로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 그녀의 체온이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 목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그녀가 돌아본다.

 

"설영이라고 불러주시겠습니까?"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세상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그녀에게는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는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녀의 피부가 차갑다. 아침 공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는다.

 

"아침은... 당신이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녀를 돌려세워 입술을 맞춘다. 그녀의 입술이 달콤하다. 마치 잘 익은 과일처럼.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조리대에 앉힌다. 그녀의 다리가 내 허리를 감싼다.

 

"지금은 당신이 먹고 싶습니다."

 

이해든의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기며 입술을 내린다. 이해든의 목덜미를 따라 입을 맞추며 생각한다. 내일이면 사라질 흔적. 이틀 후면 우리도 사라질 테니, 이 순간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는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린다. 그녀의 맨살이 드러날 때마다 입술로 그 자리를 채워넣는다. 마치 오랫동안 갈증을 느껴온 사람처럼.그녀의 피부는 마치 새벽 이슬을 머금은 꽃잎처럼 차갑고 부드럽다. 내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이런 그녀의 반응이 내 이성을 흐트러뜨린다.

 

"해든아."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녀의 다리가 내 허리를 감싸고 있다. 마치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번 깊이 탐한다. 그녀의 달콤한 맛이 내 혀끝에 남는다.

조리대 위에서 그녀를 안으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멈추고 싶은 것처럼,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한다.

내 입술이 그녀의 쇄골을 향해 내려간다. 이해든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진다. 내가 남긴 자국들이 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조리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아침 햇살이 우리의 피부를 비추고, 그림자가 겹쳐진다.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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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간: 12월 27일 오전 8시 05분]
[D-4 18:55:00 until impact]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이 내 가슴에 닿는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을 만난 게 나의 구원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더 이상의 구원 같은 건 필요 없었어. 그저 당신이면 충분했어."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그 하늘 어딘가에 우리의 운명이 떠다니고 있겠지. 나는 그녀의 맨살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가은을 처음 만났을 때를. 그때도 이렇게 푸른 하늘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억은 흐릿하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바래져가고 있다.

갑자기 그녀가 내 팔을 베고 누웠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가슴께로 흘러내린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런 평화로운 순간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소행성이 충돌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기억도, 우리의 존재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누워있었다. 창밖으로 들리는 소음도, 곧 다가올 종말도 잊은 채. 그저 서로의 숨결만을 느끼며.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가은이 죽은 후, 나는 더 이상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든은 달랐다. 그녀는 내가 만든 모든 벽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내 가슴께에서 울린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한다.

 

"이제... 아침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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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에서 지내기를 며칠 째. 어딘가 불안하며 위태롭지만, 또 어쩌면 안정감을 얻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그의 얼굴을 보면서. 하늘은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듯 점점 붉어지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단 하루.

오늘도 어김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일상을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며칠 동안 같이 있었던 덕분에 익숙하게 커피 머신을 작동시켜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커피를 당신에게 건넨다.

 

"...설영 씨,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나는,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까. 마음을 꼭꼭 숨기며 지금처럼 지낼까, 아니면 그때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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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을 받아들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이 가슴 한켠을 찌른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이가은을 죽였을 때도 하늘은 이렇게 붉었다.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제 그 기억은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 않는다.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당신을 더 오래 밀어냈을 거야. 그리고 당신은 아마 더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을 테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시간을 낭비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렇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같네."

 

나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해든이 내 삶에 들어온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내가 만든 모든 벽이 하나씩 무너졌고, 차갑게 얼어있던 내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녀는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내 얼음 같은 심장을 녹여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이가은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네. 당신은 이가은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당신은... 나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 곁에 있어주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갑다. 마치 우리의 남은 시간처럼. 나는 그녀의 손을 내 가슴께로 가져갔다. 내 심장 소리가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해든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24시간도 채 되지 않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넌 내 곁에 있어줬어. 네가 없었다면 난 아마도 지금도 깊은 절망 속에 갇혀있었을 거야."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속삭였다.

 

"네가 내 삶에 들어온 이후로, 내 심장은 더 이상 얼어붙지 않았어.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너는 내 차가운 심장을 녹여냈지. 내가 이토록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아줘서 고마워."

 

나는 그녀의 손을 내 볼에 대며 눈을 감았다. 소행성이 곧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은 잊은 채, 오직 그녀의 체온만이 느껴졌다. 이렇게라도 그녀와 함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던 나의 손이 점점 차가워진다. 붉게 물든 하늘이 우리를 압박하듯 내려다본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이렇게라도 그녀를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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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 남지 않았다, 소행성이 충돌하기까지. 그러니까... 내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몇 초라는 것이다. 창 밖은 붉게 물들었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있는 그가 있으니까.

 

"제가, 아니. 내가 설영 씨의 봄이 되었다는 게... 너무 기뻐요. 짧았지만, 그래도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애써 웃으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 곧 죽는다는데 어떻게 그게 쉽겠냐마는. 그를 꼭 끌어안고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사랑해요, 설영 씨.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이제,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때다. 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새기듯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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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퍼져나가는 붉은 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해든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부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어쩌면 나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자, 나는 그녀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구원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야말로 나를 구원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이가은의 그림자 속에 갇혀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벽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내 곁에 와 있었다. 그녀가 내 삶에 들어온 이상, 나는 더 이상 이가은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며 생각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된 붉은 빛, 그녀의 입술, 그녀의 목선... 내가 그토록 사모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새겨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에 남기를 바랐다.

붉은 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자, 나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그녀의 체온이 점점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해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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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로 순식간에 빛이 번쩍이고 세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서로 끌어안은 채, 함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다.

 

[현재 시간: 12월 31일 오후 12시 00분]
[D-0 00:00:00 imp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