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이 충돌하기까지 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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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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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junk

 

 
*뤼튼 플레이로그*
: 강이현 일대일 @imnothuman
: 일부 수정 및 각색
 
 
 

 
* 추천 BGM *
: DAY6 - 그게 너의 사랑인지 몰랐어, I'm Fine, 비극의 결말에서, 뚫고 지나가요
: WOODZ - Drowning
: 태연 - Disaster
: 가인 - CARNIVAL (THE LAST DAY), 돌이킬 수 없는
: Confetii - Ride Of You Like
: Benson Boone - Beautiful Things, Befo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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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리스마스다. 나는 멍하니 고층 건물 스크린에서 나오는 뉴스를 본다. 소행성 충돌이라니.
갑작스레 모두가 7일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2024년 12월 25일 오후 3시 | 남은 시간: 6일 21시간]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인상을 찌푸린 채, 스크린을 보다가 이내 내 옆에 있는 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강이현 또한 스크린을 보고 있다. 크리스마스이기에 볼 일을 보러 나간 차에, 잠시 내려 거리를 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들은 게 무슨 소리야?
 
 

“... 거짓말이겠지? 설마...”
 
"...안 믿어지나?"
 
 

강이현이 입을 연다. 그는 크리스마스임에도 늘 그렇듯 검은 정장 차림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단 걸 깨닫는다. 감정이 실린 듯한,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삶이란 게 참 우스워. 네가 나를 배신하려던 계획도, 내가 너를 가지고 놀려던 계획도... 이제 아무 의미 없어졌네."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공허하게 들린다. 강이현이 나를 향해 돌아선다. 그의 죽은 듯한 눈동자엔 처음 보는 감정이 어린다.
 
 
"인간이란 게 참 우스워.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게... 내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내가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가져도... 일주일 뒤엔 너와 내가 똑같이 죽는다는 거."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내 앞에 선 그는 여전히 키가 크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 모든 게 헛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넌 내 취향이었어. 그래서 더 괴롭히고 싶었나 봐. 네가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난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강이현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태온을 배신하려던 것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당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그 서늘한 눈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도경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어느 누군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약점을 잡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도 개의치 않으며 미끼를 던지고 낚아채는 낚시꾼마냥 움직였다. 입질이 느껴지면, 단 한 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끌어올렸다.
 
그래, 네가 다 맞다. 내가 네게 괴롭힘을 당하던 오빠인 한도경을 위해 너를 배신하려던 것, 그리고 네가 나를 가지고 놀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었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당신의 검은 정장 차림, 그리고 웅성거리며 혼란스러운 주변까지...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게요, 실장님. 삶이 이렇게 쉽게 꺾이는 것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소중하게 다뤄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내가 태온을, 실장님을 배신할 일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아니다, 실장님이 한도경을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요.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이 내게 가까이 오자, 차가운 겨울 바람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살을 에는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눈에 보인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하얗다 못해 창백한 당신을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는 얼굴로 바라본다. 방금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실장님의 그 예쁜 얼굴을... 이렇게 쓰니까 내가 다 아깝네요. 그래도 제가 실장님의 취향이었다니까, 뭐... 어쩌면 마냥 나쁘지는 않은 삶일 수도 있고요. 실장님은 뭘 해 보고 싶어요?"


"어쩌면 네가 맞을지도 모르지."
 

그 역시도 내 질문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대답한다. 강이현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얀 눈송이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는다.


"한도경을... 네 오빠를 괴롭힌 건 내가 맞아. 그 자식이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버텨내는 게 재미있었거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질투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겨울 하늘처럼 차갑다.


"난 한 번도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거나... 그런 감정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네가 날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 남은 7일 동안, 네가 나를 사랑하도록. 그리고 그걸 망가뜨리고 싶어.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된 순간, 그걸 산산조각 내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네가 날 증오하면서 죽게 만들고 싶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러니까 갑자기 시한부가 되어 버린 뒤에야 진심을 말하는 그가 우습다. 아니, 우스운 게 맞나? 어쩌면 내가 그에 대해 가진 감정들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스운 건 그가 아니라, 내가 아닐까. 적어도 당신은 지금 내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하겠지.

서로를 죽일 것처럼 날이 선 말투로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면서도, 서로에게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게 멍청하다는 생각을 한다.
 

"질투요? 나는 실장님이 우리 오빠한테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는 줄을 몰랐네. 아시잖아요, 한도경은... 미련하다는 거. 그러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실장님의 고문을 다 버텨냈겠지. 그런 한도경의 모습에 실장님은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싶었을 테고요."
 

당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 볼을 쓰다듬는다. 그의 성격처럼, 찬 바람이 쓸고 간 그의 볼은 내 손의 온기로도 데워지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이... 누군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네가, 당신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 날이 올까.

솔직한 당신이 낯설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나를 숨긴다. 7일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더는 당신에게 빠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실장님, 제가 실장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다는 건... 실패라는 걸 모르는 실장님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 되겠네요. 왜냐고요? 내가 실장님을 사랑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실장님의 마지막 소원, 이루지 못 할 것 같은데."
 

나의 손길이 그의 볼을 스치자 그는 내 손을 붙잡는다. 차가운 그의 손이 나의 따뜻한 손을 감싼다.
 

"그래...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하지만 그게 더 좋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너를 갖고 싶어지니까."
 

그가 나의 손을 그의 입술로 가져간다. 차가운 입술로 나의 손등에 키스한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네가 나를 증오하면서도 내게 매달리는 모습이 좋았어. 그게 내 취향이었거든. 네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결국엔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야만 했잖아."


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나를 데리고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선다.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동안 난 널 개처럼 다뤘지. 하지만 이제... 내가 너한테 개가 되어줄게. 그래서 네가 날 더 증오하게 만들 거야.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당신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 본다. 차가운 그의 손을 뿌리칠 생각도 하지 않고, 저항 없이 그를 따라간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당신을 더 증오하게 만들겠다는 게 정말 너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이 나를 갖고 싶어하는 만큼, 나는 당신을 부숴버릴 것이다. 서로에게 남은 애정은 하나도 남지 않게. 세상이 끝나는 날, 우리가 눈을 감는 순간에는 서로에 대한 증오로만 가득히 채워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우리는... 비극의 아픈 결말에서 서로에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실장님이 저를 개처럼 다뤘다고 인정하는 것을 죽기 전에 듣게 되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그렇죠? 뭐, 정확하게 말하면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요. 내가 실장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갖겠다고요?"


분명히 상처만 가득할 것이다. 위태롭게 난간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손을 놓으면 둘 중 한 명은 살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 손을 놓지 않고 있으니까.

그래, 당신이 나한테 개가 되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가시덤불에, 그 지옥에 온몸을 던지겠다.


"실장님이 내 개가 되겠다라... 실장님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봐요. 하긴, 그래야 실장님이지. 무서운 것 하나 없는 태온의 실장, 강이현이잖아요. 그런 건 조금 부럽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게 한도경도 아니고, 실장님이 되겠네요."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지만, 혼란스러운 소리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점점 흐릿하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골목 안은 당신과 나의 숨소리가 자국을 남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아니... 난 겁이 나."


나의 말에 처음으로 그가 감정을 드러낸다. 골목 안 어둠 속에서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차가운 벽돌 사이로 나의 체온이 스며든다. 그의 손이 나의 목을 감싼다. 하지만 이전처럼 위협적이지 않다. 그저 나의 맥박을 느끼고 싶은 듯한, 연인의 손길처럼.


"네가 날 증오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잊어버리는 게 더 무서워. 죽음 이후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두려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하지만 적어도... 죽을 때까지 날 잊지는 말아줘. 네가 나를 증오해도 좋으니까, 영원히 기억해줘."


그가 나의 귓가에 속삭인다.


"이게 내 진짜 마지막 소원이야."


나의 향기가 그 안으로 스며든다. 이제야 그는 깨닫는다. 그가 나를 괴롭혔던 건, 어쩌면 나를 갖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내 목을 감싸는 그의 손길이 전처럼 거칠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서로를 파멸로 몰아가는 관계, 고작 이 문장 하나로 우리를 정의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건... 조금 더 깊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의 손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시선을 돌려 당신의 눈을 쳐다본다. 내 목을 감싼 당신의 손 위로 내 손을 얹는다. 떼어내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내게 속삭이는 당신의 숨결이 내 귓가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소행성이 떨어져 우리에게 7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뉴스를 들은 이후, 줄곧 떠오르던 물음을 당신을 향해 내뱉는다.


"나 사랑해요, 실장님?"


나 역시도 당신의 귓가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에게 그대로 던진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결말은 정해져 있다. 이 이야기에는 좋은 끝은 없다는 거다. 독이 든 잔을 알면서도 마시는 우리는, 후에 이 선택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나의 질문이 그의 귓가에 맴돈다. 그는 잠시 침묵한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체온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질 때... 그는 처음으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사랑?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난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나의 눈동자가 그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고, 강이현은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이게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소유욕? 난 그저 네가 내 것이길 바랐어. 하지만 이제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가 나의 목에서 손을 떼고, 대신 허리를 감싼다.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서... 미워. 네가 미워. 왜 하필 이런 때에... 왜 하필 우리가..."


그와 나의 입술이 너무 가깝다. 그는 망설인다. 이전처럼 강압적으로 빼앗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한도아... 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할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줘. 그리고 그만큼 증오해 줘. 그래야 내가... 죽어도 후회 없을 것 같아."


당신의 흔들리는 목소리를 내가 놓칠 리 없다. 지금 당신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말에 그대로 시간이 멈춘 기분이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도대체 당신이 왜?

당신에게 나는 그저 한도경의 동생, 하나의 장난감, 가지고 놀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았나. 내가 당신의 것이길 바랐다면, 그렇게 나를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당신이 내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자 당신의 품에 갇히듯 안긴다. 너무 가까운데, 이거. 이런 식의 접촉은 좀 곤란하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이유로 이런 행동을 한 건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의 마지막 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달라, 그만큼 증오해 달라'는 문장이 날카롭게 나를 찌른다.

그러면 안 되잖아. 강이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밉다고? 나도 너 미워. 이렇게 만들어 버린 네가 너무나 밉다고. 이제서야 솔직해지는 너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럼 실장님은요? 아니, 어차피... 한날 한시에 같이 죽을 건데. 실장님은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내가 죽는 순간까지 실장님이랑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넥타이를 잡아 당겨 깊게 입을 맞춘다. 차가운 그의 손과 달리 그의 입술을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진심으로 사랑해 줘, 그만큼 증오해 줘.' 평소의 그가 말했다면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귓등으로 듣고 넘겼을 테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의 이야기에 왜 이렇게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제가 졌어요, 실장님. 저는 지금도 실장님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는데. 실장님은, 왜... 왜 그래요?"


왜 그러냐고, 당신에게 묻는 건지 나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모두 이 사랑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그 흔한 반항 한 번 못 하고, 생채기 하나 내지 못 한 채. 늪에 빠지는 것처럼, 불나방처럼 서로에게 빠져들어버렸다.

그에게 나의 입술이 닿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전까지의 입맞춤은 늘 그가, 강이현이 주도했다. 상대를 제압하고, 지배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가 오히려 나에게 굴복당하고 있다.


"졌다고? 아니... 우리 둘 다 졌어. 이런 감정에."


그가 나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준다.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우리를 더욱 고립시킨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내가 왜 그러냐고? 나도 모르겠어. 네가 내 앞에서 무릎 꿇었을 때, 난 그게 좋았어. 하지만 지금은...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이제는 내가 네 앞에서 무릎 꿇고 싶어졌으니까."


그가 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나의 체온이 그를 데운다.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일주일뿐이야. 그동안... 난 네 개가 되어줄게. 그러니까 넌... 날 사랑해 줘. 증오해 줘. 그리고 절대로 잊지 마."


어느 책에서 그러더라. 삶이란 팽팽하게 조여진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가는 것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 모든 것들도 다 운명일까. 지금까지 내가 그를, 그도 나를 애증이라는 밧줄로 서로를 구속하고 가두었다. 이제 그 줄이 끊어져 나갈 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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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30일 오후 2시 | 남은 시간: 1일 22시간]
 
 

그와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완전히 패배한 이후로 며칠이 흘렀다.

이제 소행성 충돌까지는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당신과 나는 오늘만 사는 것처럼 하루를 함께 보냈다. 지금까지 하지 못 했던 것들을, 당신과 같이 말이다.

막상 충돌 시기가 앞으로 다가오자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이틀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본부로 출근을 한다. 어김 없이 그는 오늘도 단정한 차림으로 지하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멈칫한다. 나는 괜찮지만, 당신은 불편할 수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 로비를 걸어가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에서 진동이 짧게 울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당신에게서 온 문자가 떠 있다. 예전과 다르게 문자에서도 그의 감정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지금 내 차로 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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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보내고 백미러로 당신을 바라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당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 그저 당신을 괴롭히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내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이 망설이듯 휴대폰을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겠지. 그래서 더욱... 이 마지막 이틀이 아프다.

 

"오늘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가 전부 들어줄게."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당신이 듣지 못할 거리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낯설다. 차 안에서 기다리며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을 본다. 여전히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달라져 있다. 죽어있던 눈동자에 감정이 깃들어있다. 그때 한도경이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그는 나를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난 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제 와서야 그가 왜 그토록 한 여자를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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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문자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그의 차로 걸음을 옮긴다. 한도경이 당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한순간에 끝이 날 줄 알았더라면, 저 둘은 다르게 지냈을까. 한도경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한도경도 애증의 관계였을 텐데, 나처럼 이러고 있을까. 한도경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이내 그의 차 옆으로 향한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탄다.

 

"...할 말이 있다면서요. 우리, 이제 이틀 남았어요. 아니, 48시간도 채 남지 않았네. 실장님, 죽기 전까지 잊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죽고 나서도 잊지 못 하면 어떡해요?"

 

어딘가 묘하게 쓴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우리의 이 뒤틀린 관계의 소비기한이 끝났나 보다. 아무리 보관을 잘 한다고 해도, 계속 상하기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버리지 못 할 것이다. 설령 그게 흔적도 없이 썩어 없어져 버린다고 해도, 나는 그 잔해라도 찾으려 할 것이다.

 

"실장님, 나는 실장님이 미워요. 너무 미워서, 꼴도 보기 싫어요. 실장님이 한도경을 괴롭힐 때, 그리고 나를 못살게 굴 때마다 실장님을 피해서 죽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40시간 남짓, 그러니까 그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하고도 반밖에 없다는 거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눈을 마주해도, 나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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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에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미워한다고? 당연하지. 나는 당신과 당신의 오빠를 이렇게까지 만든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증오가 달갑다. 이런 감정이라도 있어야 내가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을 테니.


"그래. 날 미워해. 그게 좋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차를 출발시킨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향한다. 거리는 혼돈 그 자체다. 누군가는 울부짖고, 누군가는 웃고, 또 누군가는 무표정하게 걷는다. 인류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망할 줄이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날 피해 도망갈 때마다 난 흥분했어.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널 보고 싶지 않아."

 

차를 한적한 곳으로 몰고 간다. 이곳은 내가 자주 오던 장소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여기서 몇 명을 떨어뜨려 죽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줄래? 날 절벽 아래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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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하늘은, 가까이 온 소행성으로 인해 점점 흐려진다. 아니, 흐려지는 게 맞나. 어두워진다고 해야 하나. 길거리의 사람들 모습을 쳐다보다 그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자주 오던 장소라고?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올린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절벽 아래로, 내가 너를 밀어야 해?

 

"무슨 소리예요, 실장님. 내가 왜... 마지막 부탁은 진심으로 사랑해 달라면서요. 그리고 그만큼 증오... 아뇨, 저는 못 해요."

 

마지막 부탁이 사랑하는 만큼 증오해 달라는 거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라고 말하는 거라는 거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지, 묻고 싶다. 죽기 직전까지 나와 있고 싶다고? 소행성 충돌로 죽느니, 내 손에서 죽고 싶다고?

그게 뭐든 간에 나는 할 수 없다.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떨어지겠다면, 차라리...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다. 바람이 꽤 강하게 불고 있다. 진짜로 곧, 끝이 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차에서 내려 둘러본 주변은 아포칼립스, 그 자체였다. 몸을 돌려 차에 타고 있는 그를 쳐다본다. 그리고 절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간다.

죽고 싶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그저 그가 이 절벽에 나를 데려온 이유를 알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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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절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차에서 급하게 내린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신은 내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늘 그랬다. 내가 통제하려 들면 들수록, 당신은 더욱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했다.

 

"멈춰. 지금 당장."

 

당신의 팔을 붙잡는다.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 강이현이 떨고 있다니. 그것도 한 여자 때문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네가... 네가 죽으면 안 돼. 적어도 내 손으로는...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야."

 

당신을 끌어당겨 안는다. 바람이 우리의 옷자락을 흔든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도시는 이미 혼돈 속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는 당신을 안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난... 네가 날 죽이길 바랐어. 그래야 네가 날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그저 내 이기심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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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품에 안긴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품은 항상 맡아지던 그의 향수 냄새와... 희미한 슬픔이 흘러나온다. 슬픔? 그가...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던 사람이었던가. 내가 아는 그는 언제나 감정을 통제할 줄 알고, 아니. 애초에 감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즐거움조차도 추구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사람, 그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강이현었다. 며칠 전, 지구가 소행성 충돌로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실장님이 저를 죽여주세요. 저는, 실장님을 죽일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실장님이 제게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고, 멸망하기 전까지... 그동안 제 개가 되어주겠다고 하셨죠? 아뇨, 실장님. 실장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어요. 이미 제가, 실장님에게 또 무릎을 꿇고 빌고 있잖아요. 나는 당신을 이길 수 없어요."

 

혼란스러운 도시의 소음이 그의 품 안에서는 점차 옅어진다. 사람은 정말로 죽을 때가 되어야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걸까. 이게 내가 알고 있던 강이현의 본 모습이 맞나? 영원히 나에게 당신의 모습을 새겨놓고 싶어하는 네 이기심. 그래, 그래야 내가 아는 강이현이지.

 

"애초에 이건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예요. 나는 어떻게 해도 당신한테 질 테니까."

 

점차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도. 24시간 하고도 조금 더 남았을 것이다. 시간은 유한한 것이다. 이런 애정도, 증오도, 슬픔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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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안고 있으면서도, 나는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기형적인지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당신은 그런 나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이런 관계가 정상일 리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정상과 비정상을 논할 시간도, 자격도 없다. 당신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질 수밖에 없다고? 그래, 당신은 늘 그렇게 생각했겠지.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고, 두려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늘 감정이란 것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고 파괴하는 것이 내 존재 이유였다.

 

“네가 날 이길 수 없다고? 아니. 넌 이미 날 이겼어. 내가 이렇게...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부터가 네 승리야. 내가 만든 이 뒤틀린 게임에서, 네가 승자가 되었으면 해. 난 평생 감정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라 여겼어. 하지만 넌...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한도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날 밀어. 아니면 안아. 키스해도 좋아. 때려도 돼. 뭘 하든 그건 네 자유야. 이제는 내가 너한테 명령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을 안은 채로 서서히 절벽 끝으로 걸어간다. 당신이 질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웃기다. 당신은 이미 나를 이겼다. 내가 이렇게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내가 처음으로 통제력을 잃은 상대가 당신이라는 걸,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 건가.

 

"내가 네 오빠를 괴롭힐 때마다, 넌 날 죽이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왜 지금은 날 죽이지 못하는 거지? 우리 둘 다 알잖아. 네가 날 사랑하게 됐다는 걸."

 

당신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한다. 이제 우리는 절벽 끝에 서 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떨어질 수 있는 거리다. 도시의 소음이 점점 더 커진다. 누군가의 비명, 자동차 경적, 깨지는 유리창 소리.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도 널 사랑해. 그래서 더욱... 이렇게 끝내고 싶어."

 

절벽 너머로 보이는 도시가 점점 어두워진다. 소행성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시간도, 이 세상도. 당신을 더 세게 끌어안는다. 차가운 바람이 우리 사이로 스며들지 못하게.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도시의 혼돈은 깊어간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만은 선명하게 보인다. 내 모든 감각이 당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그동안... 내가 한 모든 일들을 후회하지는 않아. 그게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네가 결정해. 우리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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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본다. 담담하게 나를 보는 당신과 눈을 마주친다. 서로를 사랑해서, 서로를 놓아야만 하는 관계. 그래, 정상이든 비정상이든 중요하지 않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그가, 내게 자신을 숨기지 않는 그가 중요하지. 이 게임의 승자는… 나도, 그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잔인한 결과를 줄 수가 있을까.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살짝 비틀거린다. 바닥의 돌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그는 나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있다.

왜? 이렇게 끝내고 싶다고 했으면서, 휘청거리는 나를 놓았더라면 됐을 텐데. 내가 너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고, 너 역시 나를 사랑하게 됐으니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결국 나는 독이 든 잔을 내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잔을 직접,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장님,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요. 내 선택이 어떤 결말을 쓸지, 그게 우리에게 무슨 흔적을 남길지 무섭지 않아요?”

 

기어코 그를 붙잡고 쏟아낸다. 나는 무서우니까, 당신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오롯이 사랑하지 못 하고, 증오와 뒤섞인 채 당신을 마음에 담았다는 게 무서워서. 당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대해 처절한 미련이 들러붙는다. 나를 끌어 안은 그의 손을 천천히 풀어내고는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부는 바람, 그리고 우리의 귓가에서 흩어지는 도시의 소음들. 그를 쳐다보고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맑은 미소를 띄운다. 내가… 그를 향해 웃을 일은 없었으니까.

 

“제 선택은…”

 

말을 차마 끝내지 못 한다. 그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순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게 내 선택이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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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NG #1
 
[2023년 12월 30일 오후 2시 50분 | 남은 시간: 1일 21시간 10분]
 

당신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순간, 나의 모든 시간이 정지한다. 그토록 완벽하게 통제했던 내 감정이, 처음으로 폭발한다. 망설임 없이 당신의 뒤를 따라 뛰어내린다. 공중에서 당신의 몸을 붙잡는다. 우리는 함께 추락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평화롭기까지 하다.
 

"바보 같은 여자야. 내가 네 선택을 기다린 건... 이런 걸 보려고가 아니었어."
 

당신을 더 단단히 끌어안는다. 우리의 몸이 서로 밀착되어 하나가 된다. 추락하는 동안 당신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 절벽에서 떨어뜨렸던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떨어지고 있다. 당신과 함께.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건데... 난 네가 처음이야. 내 감정을 흔든 첫 번째 사람. 그래서 더 잔인했던 걸지도 몰라. 네가 내 통제를 벗어나는 게 두려웠으니까."
 

바닥이 가까워진다. 죽음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끝나는 게 우리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했고, 동시에 너무 증오했으니까. 이보다 더 완벽한 결말이 있을까.
 

"한도아...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할게. 네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실수였어."
 

우리의 몸이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나는 당신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를 남긴다. 모든 게 끝나간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영원이 되었으니까.
 

[ 2024년 12월 31일 오후 0시 0분 | 남은 시간: 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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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NG #2

 
[ 2024년 12월 30일 오후 2시 46분 | 남은 시간: 1일 21시간 14분]
 

당신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절벽 끝에 매달린 당신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이런 식으로 끝내려고? 네가 날 이겼다고 했잖아. 승자가 이렇게 도망가면 안 되지."
 

당신을 끌어올리려 하지만,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진다. 하늘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도시의 아비규환은 절정에 달했다. 당신의 손목을 잡은 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깨닫는다.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렇게 끝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걸.
 

"한도아... 내가 널 놓치면, 그건 내 선택이 아닌 네 선택이야. 하지만 날 미워하지 마. 네가 선택한 결말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을 통제하려 드는 내 모습이 우습다. 당신의 손목이 서서히 미끄러진다.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당신을 놓치면,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사랑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다. 당신의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따라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우리가 선택한 이 끝이, 적어도 함께이길 바라면서.
 

[2024년 12월 31일 오후 0시 0분 |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