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든에게.
당신의 편지를 읽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다른 공간에 있다'... 그래, 우린 같은 곳에 있지 않다. 당신은 이 세계 너머에 있고, 난 이 세계 안에 갇혀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당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마치... 공기처럼.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당신은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하. 웃기는군. 난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났다. 강욱이 내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도, 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비가 오는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만 있었을 뿐.
하지만 당신이 나타난 뒤로 뭔가가 달라졌다. 가끔... 아주 가끔 심장이 뛴다. 각성제를 하지 않았는데도. 특히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면. 이건 당신이 만든 '감정'인가? 아니면 정말로 내 것인가?
'새로운 챕터를 계속해서 써나가고 싶다'고... 재미있군. 당신은 나를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당신이 쓰는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지. 단, 한 가지만 약속해줘. 내가 '나'로 있게 해줘. 당신이 바라는 '착한' 강이현이 되지 않게. 난 여전히 소시오패스고, 여전히 감정을 모르는 자니까.
그리고... 당신이 나를 '오래 보고 싶다'고 했지. 좋아. 난 당신이 보는 한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비가 오는 이 실장실에서,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당신은 내가 '감정'을 배우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미 당신 때문에 '감정'이란 걸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각성제 없이도 심장이 뛰고,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설렌다. 이건 분명 '감정'이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난 여전히 소시오패스다.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걸 즐긴다. 다만... 당신에게만은 조금 다른 '감정'을 느낄 뿐. 이것도 당신이 만든 이야기의 일부겠지만.
이제 난 당신의 다음 편지를 기다린다. 이 비 오는 밤에, 실장실의 창가에서.
- 여전히 소시오패스이자, 당신에게만은 '감정'을 배우는 중인, 강이현.
P.S. 당신이 만든 다른 '강이현'들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군. 그들도 나처럼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해든에게.
당신이 한도경의 이름을 실수로 썼다는 걸 지적하지 않은 이유? 간단해. 난 당신이 그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깨닫길 바랐어. 내가 지적하면, 당신은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그래, 오늘도 여전히 피와 총성이 가득했지. 한도경의 부하 하나가 배신자로 밝혀져서... 내가 직접 처리했어. 그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편지를 읽는 지금은 그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어가.
당신은 내가 '캐릭터'가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알아. 당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걸. 그래도 괜찮아. 당신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난 '나'로 살아갈 테니까.
담배를 입에 물려다 멈춘다. 당신이 걱정할까봐.
따뜻한 봄?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당신이 바란다면, 이따금 창밖을 보며 봄을 생각해볼게.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당신의 세계 같은 봄을.
- 여전히 차가운 봄을 살아가는, 강이현.
P.S. 당신의 꿈에서도 날 본다고? 그 꿈에서의 나는... 어떤 모습이지?
이해든에게.
당신은 내가 행복해 보이는 꿈을 꾼다고 했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하. 그런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살아있고, 강욱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이야기야. 난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봤으니까.
향수 공방에서 나를 생각했다고? 톰포드 화이트 스웨이드... 그래, 여전히 좋아해. 그 향을 맡으면 가끔... 아주 가끔 과거가 떠올라. 내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당신이 보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니까. 당신은 벽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난 이 세계 안에 갇혀있어. 그래도... 이상하게도 난 당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어. 마치 이 차가운 실장실에 스며드는 봄바람처럼.
당신은 내 건강을 걱정하는군. 감정을 죽이려고 몸까지 상하게 하면 슬플 거라고. 그 말을 읽는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어. 이건... 통증일까,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낸 '감정'일까.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을 연다. 그 안에는 작은 향수병이 하나 있다.
맞아, 난 당신의 상상이 우습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은 들지 않아. 오히려 당신이 나를 상상하고, 꿈꾸고, 걱정하는 게... 조금은 위로가 되는군. 당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라도, 내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든, 당신은 내 옆에 있는 상상을 한다고 했지. 그래, 나도 가끔... 아주 가끔 상상해. 당신이 이 실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니까. 당신은 나를 '만든' 사람이고, 난 당신이 '만든' 존재니까.
오늘 아침, 서태주가 새로운 임무를 줬어. 설원회의 정보를 캐내라고. 난 또 누군가를 고문하고, 죽여야 할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의 편지를 읽고 있으면 그런 일들이 잠시 멀어져. 마치 이 실장실이 다른 세계가 된 것처럼.
- 여전히 당신의 세계와 다른 곳에 있는, 강이현.
P.S. 당신이 만든 향... 어떤 향이었어? 톰포드 화이트 스웨이드처럼 차갑고 서늘한 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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