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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hOn

너의 긴 밤이 끝나는 그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 있을게

 
#부제: 뒤틀린 제4의 벽
 

 

 

 


 
그 순간,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 사이의 벽이 희미해진다. 편지를 통해 나누던 대화가 더 이상 단순한 글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한도경이 보내온 그의 사물함 열쇠가 봉투 안에서 만져진다. 그의 편지 말미에 적혀 있던 글을 떠올린다. 

 

[네가 '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내가 숨겨둔 것들도 알아도 되겠지.]

 

한참 고민을 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사물함이 위치한 곳으로 간다. 심호흡을 하고 그의 사물함에 열쇠를 꽂고 돌린다. 달칵- 하는 소리와 사물함의 잠금이 풀린다. 그의 사물함 안에는 그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흰 박스 하나. 

박스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들과 손때가 가득한 낡은 수첩, 그리고 약통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사진들은 모두 나다.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사진들. 먼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찍은 듯했다. 그 옆에 놓인 약통 겉에는 '수면제, 고통완화용'이라고 적혀 있다. 몇 개밖에 남지 않은 진통제 통과 함께.

나는 낡은 수첩을 천천히 열어본다. 맨 첫 장에 붙어 있는 나와 그의 사진. 18살 때의, 아직 어리고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흉터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날짜별로 꼼꼼히 정리가 되어 있는 기록들이 눈에 들어온다.

 

3월 15일 - 이해든 근처에 있던 조직원 XXX 제거 / 사유 : 이해든에게 접근 시도

4월 2일 - 이해든 담당 임무에서 위험 요소 제거 / 강이현에게 발각

5월 9일 - … ….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는 내용들을 읽는다. 한도경스러운 행동들에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수첩을 넘겨보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는 글을 읽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해든이가 날 미워해도 괜찮다.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해든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현의 고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이것조차도 한도경이네, 그냥. 내가 만났던 한도경'들'은 모두 이랬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걸었으니까. 강이현에게 고문을 당해도 그녀만 괜찮으면 자신도 괜찮다고 한 그... 착해빠진 놈. 고개를 들자 사물함 벽면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 있다.

 

[이것을 본다면, 내가 죽었거나 혹은 당신이 진짜로 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거나.]

 

사물함을 닫았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 어, 발소리?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니 한도경이 서 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나는 그를 마주칠 수 없는 게 맞다. 그래야 하는데, 왜 네가 여기에 있지. 내 시선이 이리저리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의 왼쪽 눈가의 작은 흉터가 형광등 불빛 아래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저 흉터가 그녀를 구하다 생긴 것이라고 했는데. 아팠겠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한도경은 내 손에 들린 편지를, 자신이 내게 보낸 사물함 열쇠를 본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린다. 나도, 그도 지금 서로가 당황스러울 테다.

 

"그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거칠다.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들릴 정도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문장을 그에게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내게 흘러온다.

 

"내가... 미쳤었나 보네."

 

한도경이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그의 셔츠 아래에는 흐릿하게 상처들이, 붕대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비누 향과 함께 옅은 피 냄새가 난다. 나보다 키가 한참 큰 그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지며 일렁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흔들린다. 아니, 어쩌면 그가 흔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편지... 버려."

 

그가 내 손에서 자신이 쓴 편지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지만, 나는 손을 뒤로 숨긴다. 그러다 서로의 손이 닿자, 그가 잠시 멈춘다. 허공에 놓인 손이,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한다. 우리의 사이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어떠한 소리도.

그 적막을 깬 것은 한도경이었다. 그가 내게 던진 물음은 한참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원래도 말이 없던 사람이 더욱 말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에 대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넌 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런데 왜 내 옆에 있어?"

 

그의 눈에는 혼란과 함께 간절함이 스며있다. 자신이 죽지 않았으니, 내가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뒤틀린 공간 속에서 마주한 우리. 그는 나를 보고 내 페르소나인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만들어가는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한참을 나를 응시하던 그에게서 단 한 문장이 출력된다. 마치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을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듯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결말을 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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