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 1

https://mangsangmachine.tistory.com/

about junk

 

*뤼튼 플레이 로그*

: 태X설 연애 리셋 기반

: 강이현 일대일 @imnothuman

: 일부 수정 및 각색

 

 

https://youtu.be/3ksvZ8_2lmo?si=PRUcJcc1uqWrRdtP

 

https://youtu.be/u18be_kRmC0?si=M4CX01xzEk6KE421

 

https://youtu.be/0f82Gy4bzT8?si=N6rR6f4otWhC7Z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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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부검실에 짧은 진동이 울린다. 부검 결과를 작성하다가 손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응시한다.

 

 

제목 없음

[Web 발신]
안녕하세요! '연애 리셋' 캐스팅 담당 제작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실례지만 이해든 님과 교제하셨다가 결별하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해당 여성분과는 이야기가 끝났으며 괜찮으시다면 섭외가 가능하실지 여쭤봅니다!
출연 여부는 미팅 후 결정하셔도 됩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법의학자의 삶이 바꾸지 못한 건, 나의 냉혈한 성정이었다. 연인이었던 당신과 결별한 이유도, 내가 당신의 온기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문자를 본 순간, 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연애 리셋.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하 부검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온 적은 없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감정이 움직이다니.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둔다. 오늘도 부검실은 차갑다. 부검대 위에는 또 다른 시체가 놓여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표정으로 메스를 잡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집중이 되지 않는다. 메스가 시체의 가슴을 가르는 순간, 당신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왔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당신은... 내 심장을 마취도 없이 도려냈지.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서 심장을 가져간 걸 모른 척했다.

6년의 연애는 결국 내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당신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시체의 심장을 적출하며 생각한다. 당신이 내 심장을 가져갔으니, 나도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야 공평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면, 당신은 죽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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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5년 전에 헤어졌다. 장장 6년을 연애하고서, 말 한마디로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나에게 온 '연애 리셋' 제작진의 문자. 그 문자를 받고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답장을 천천히 적는다.

 

[참여하겠습니다.]

 

괜히 참여하겠다고 했나. 아니, 하지 말걸. 그를 다시 볼 자신이 없다. 그래, 다시 보게 된다면 또 내가 흔들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와의 이별 이후 나는, 일상을 다시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빠진 자리를 채우려고,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비어버린 내 삶의 일부를, 나를 괴롭히며 채웠다. 그래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와 헤어진 순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그때의 내 표정은 어땠더라.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별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는 지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헤어지자"라고만 했다. 가타부타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받은 이별 통보에 나는... 나는, 뭐라고 했지. 알겠다고 했나? 싫다고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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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나는 법의학자다. 매일 차가운 시체를 만지며 살아있는 것들의 진실을 찾아낸다. 하지만 당신과의 6년은, 내가 찾아낼 수 없는 진실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다. 당신은 아직도 내가 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걸까. 내가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하던 그날처럼.

오늘도 부검실은 썩어가는 시체 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메스를 들고 시체의 심장을 적출한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당신은 내 심장을 가져갔는데도 나는 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의 적막함이 좋았다. 시체와 함께하는 시간이 편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달랐다. 당신은 내게 사랑을 요구했고, 나는 그것을 주지 못했다.

내 손에 들린 메스가 빛을 반사한다. 부검실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도 날카로운 그 빛은 아름답다.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부검 기록을 쓰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흐리다. 당신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처럼. 그날도 비가 내렸다. 당신은 울었고,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부대 위의 시신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당신이 일했던 병원 응급실의 새벽 풍경도 이랬을까.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당신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당신이 내게서 찾던 것은 '다정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로 살을 자르는 일이 익숙해진 나의 손으로는, 당신의 뺨을 쓰다듬을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는데도, 나는 그저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당신이 싫다고 말했으면 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붙잡을 핑계가 생기길 바랐다. 하지만 당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했다는 듯이. 나는 그 순간 당신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울었다는 걸 안다.

당신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나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시간은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울었는지, 왜 그토록 아파했는지. 내가 그저 당신의 심장을 도려내듯, 당신도 내 심장을 도려냈을 뿐인데.

연애 리셋. 그 문자를 받고 나서 하루 종일 생각에 잠겼다. 시체의 피부를 절개하면서도, 장기를 적출하면서도, 부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끊임없이 당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이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던 모습, 화가 났을 때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 슬플 때 입술을 깨무는 모습까지.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은 한 장의 사진처럼 멈춰있다.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이해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부검실에 울리는 내 목소리가 낯설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난 후, 나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동료들은 내가 원래부터 과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알 것이다. 내가 당신과 함께였을 때는 달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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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당신은 내 침묵을 확신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배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배우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온기가 두려웠다. 내 안의 얼음이 녹아내릴까 봐.

부검대 위에 놓인 시체를 바라본다. 죽은 자의 얼굴이 평화롭다. 살아있는 자들의 얼굴은 늘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한데, 죽은 자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시체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당신도 지금쯤 평화로워졌을까. 내가 당신에게 준 상처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은 아물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부검 도중 실수를 했다. Y자 절개선이 흐트러졌다. 당신이 내 안에 남긴 흔적이, 이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나는 메스를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당신과 함께했던 2190일의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가 처음 만난 병원 응급실, 당신이 내게 건넸던 따뜻한 커피, 마지막으로 본 당신의 뒷모습까지. 시간은 흘렀지만,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문득 당신이 응급실에서 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살아있는 것들을 살리려 애쓰던 당신과, 죽은 것들의 진실을 찾는 나.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았다. 당신이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과 이 부검실은 다르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당신은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지켰고, 나는 꺼진 뒤의 진실을 찾았다.

오늘은 더 이상 부검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시체의 얼굴이 자꾸만 당신의 얼굴로 보인다. 부검실을 나서며 휴대폰을 든다. 답장을 보내야 할까. 보내지 말아야 할까. 망설임 없이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망설인다.

결국 답장을 보냈다. '참여하겠습니다.' 한 문장을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망설이는 건 처음이다. 시신을 해부할 때도, 사인을 판단할 때도, 나는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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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참여하겠다고 했다는 내용과 첫 미팅 날짜가 적힌 문자. 나는 그 문자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기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한 걸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고 프로그램 참여를 승낙한 걸까. 글쎄, 그저 그를 다시 보고 싶어서? 아니면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이유를 듣고 싶어서?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하나는 알 것 같다. 나는, 그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했다. 아니, 아직도 사랑한다. 그가 비록 나에게 사랑을, 애정을 주지 않더라도.

그는 죽음이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죽음보다는 생명에 더 가까웠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우리는 생각보다 꽤, 많이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입에서 이별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도려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맞냐는 내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미 내 심장은 당신의 손에 있다. 내가 당신의 심장을 쥐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도 내 심장을 가져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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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당신도 프로그램 참여 승낙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답장을 보낸 지 하루 만이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한 걸까.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왜 끝나야 했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어서일까.

동료 법의학자가 내게 물었다. 왜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서? 아니면 우리가 왜 끝났는지 이해하고 싶어서? 아니면... 당신이 내게서 가져간 심장을 돌려받고 싶어서? 나도 모르겠다.

오늘도 부검실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다. 새하얀 벽과 차가운 조명, 쇳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기구들. 이곳에서 나는 매일 시체와 대화한다. 그들은 내게 진실을 말해준다. 각자의 죽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심장마비, 뇌출혈, 질식사. 하지만 우리의 이별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당신과 나 사이의 이유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당신과의 첫 만남이 이곳 병원이었다는 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응급실에서 일하는 간호사와 부검실의 법의학자.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았다. 당신은 생명을 살리려 했고, 나는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 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시체의 모습이 선명하다. 나는 메스를 들고 있지만, 오늘따라 손이 떨린다. 시체의 가슴팍을 절개하려다 문득 멈춘다. 당신이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살아있는 심장을 지키려 했던 당신과, 죽은 심장을 해부하는 나.

시체의 심장을 적출하며 생각한다. 인간의 심장은 평균 300g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당신이 가져간 내 심장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리고 내가 가져간 당신의 심장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도려내고도 살아있다. 이것이 기적일까, 저주일까.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할 테지.

부검 결과를 정리하다 말고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마주했다. 당신은 응급실에서 생명을 살리려 했고, 나는 부검실에서 죽음의 진실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서는 무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다. 마치 우리의 관계처럼. 흑과 백 사이 어딘가에 멈춰있는.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당신은 내게서 멀어졌다. 그 거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 다시 만나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시체를 보관하는 냉장고 문을 닫는다. 차가운 금속 소리가 부검실에 울린다. 당신은 지금 어떤 표정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을지 떠올린다.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차 안에서 휴대폰을 본다. 제작진이 보낸 미팅 날짜와 시간.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 그때 당신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5년 만에.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아니, 나는 표정을 지을 수나 있나.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오늘 부검한 시체 중 하나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심장이 멈추면 사람은 죽는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 살아있는 걸까. 당신이 내 심장을 가져갔는데도.

집으로 가는 길에 당신이 일하던 병원 앞을 지난다. 응급실 불빛이 여전히 밝다.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가고, 또 누군가의 생명은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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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해는 뜨고, 새로운 하루는 시작된다. 이건 언제나 반복된다. 대신 차이가 있다면... 오늘은 '연애 리셋' 미팅이 있는 날이라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하겠다고 했나. 머리를 긁적이다가 옷장 문을 연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감도 안 와서, 이것저것 꺼내어 거울을 본다.

그러기를 몇십 분, 결국은 짜증이 나서 침대 위에 꺼낸 옷들을 던져둔다. 검은 슬랙스, 연분홍 타이 셔츠, 그리고 코트. 평소에 그가 좋다고 했던 향수, 한숨을 작게 내쉬고 가볍게 뿌린다. 휴대폰으로 날아온, 주소와 시간이 적힌 제작진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긴장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나 보다. 5년 만에 다시 만나는 그라서.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 그는 나를 기억이나 할까. 5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나는. 헤어졌으니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연락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이 프로그램에 나오겠다고 했다.

차를 운전하려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헤드셋을 끼고, 가방을 들고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풍경이 예쁘다. 오늘따라 유독,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심장소리가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섞여 들린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도 들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느덧, 방송국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로비로 들어선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역시 사람이 많은 곳이구나. 안내데스크로 향한다. 프로그램 미팅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제작진의 문자를 보여준다. 임시 출입증을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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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시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방송국 앞에 새벽부터 와있는 내가 이상하다. 왜 이리 서두른 걸까. 당신이 도착하기 전, 방송국의 공기를 잠시나마 들이마시고 싶어서였을까. 새벽의 찬 공기가 호흡기를 훑고 지나간다.

차가운 지하 부검실이 아닌 곳에서 당신을 만난다는 게 낯설다. 시체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깨끗한 정장을 입었다. 손톱 밑의 죽은 자의 흔적도 전부 씻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당신은 그걸 알아차릴까.

로비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맑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구나. 당신과 헤어지던 날과는 다르다. 그날의 하늘은 무거웠고,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마치 당신의 눈물처럼. 당신은 울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당신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보았으니까.

벤치에 앉아 시계를 본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이런 건 처음이다. 시체와의 약속에도 늦은 적 없었지만, 이렇게 일찍 온 적도 없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마치 내 부검대 위에 놓인 시체처럼,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방송국 직원들이 분주히 오간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과는 다른 공기다. 여기서는 모두가 살아있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해있다. 당신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난밤 부검했던 시체가 떠오른다. 심장마비로 죽은 40대 남성이었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전까지 26만 번을 뛰었다고 한다. 인간의 심장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10만 번을 뛴다. 당신과 함께했던 2190일 동안, 우리의 심장은 21억 9천만 번을 뛰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방송국 로비의 공기가 차갑다. 마치 부검실처럼. 하지만 이곳에는 포르말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대신 커피 향과 사람들의 향수 냄새가 섞여 있다. 당신이 좋아하던 바닐라 라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착각일까. 당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흰 가운 대신 검은 정장을 입은 나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같다. 시체를 보듯 차갑게 세상을 관찰하는 눈. 당신은 그걸 '죽은 사람의 눈'이라고 했었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나는 살아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당신을.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뛴다. 당신일까. 고개를 돌리자 낯선 사람들이 내린다. 아직 아니구나. 시계를 본다. 1시 45분. 이제 15분 남았다. 부검실에서는 이렇게 긴 15분을 경험한 적이 없다. 시체들은 항상 정시에 도착했고, 나는 그저 그들의 진실을 찾아내면 됐다.

하지만 당신과의 만남은 다르다. 당신의 진실을, 우리의 진실을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의 발소리가 로비를 채운다. 그들은 살아있다.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쉰다. 나는 그들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둥, 둥. 마치 부검실에서 들리는 메스가 뼈에 닿는 소리처럼 규칙적이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발소리가 멈춘다. 고개를 들어보니 당신이 서 있다.

당신은 5년 전과 똑같다. 아니, 다르다. 더 아름다워졌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특유의 빛이 난다는 걸, 나는 부검실에서 배웠다. 당신의 얼굴에서도 그 빛이 난다. 죽은 자들만을 보던 내 눈이 잠시 부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당신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불규칙하다. 내 심장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당신은 내 심장을 살리려 했고, 나는 당신의 심장을 해부하려 했다.

제작진이 다가온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당신이 입은 연분홍빛 셔츠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마치 갓 적출한 심장처럼 선명하다. 당신은 여전히 생명의 색을 입는구나.

'5년 만이네요.' 당신이 먼저 입을 연다. 목소리가 떨린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다시 침묵한다. 이 침묵은 부검실의 침묵과는 다르다. 저곳의 침묵은 죽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곳의 침묵은 살아있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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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고, 침묵은 이어진다. 그는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는다. 제작진들은 어느새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 복도에는 이제, 오롯이 우리 둘만 남았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6년의 시간이라는 건 그런 거다. 습관처럼, 매일 만들어가는 일상처럼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자리를 잡는 것이다. 어릴 때 탔던 두 발 자전거를, 한동안 타지 않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타더라도 금세 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도, 나도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래,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이다. 나는 핑계가 필요했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만한 아주 적당한 핑계거리가.

5년 만에 본 당신은 여전했다. 아니, 여전했다기보다... 좀 더 공허했다. 죽은 사람의 눈, 나는 그 눈을 좋아했다. 세상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쳐다보는 그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좋았으니까. 그때만큼은 죽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생명이 깃들어 있는 눈처럼 보였다.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제작진이 나와 당신을 나란히 앉힌다. 우리에게 무슨 질문을 할까,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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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이 우리를 앉힌 회의실은 차갑다. 마치 부검실처럼. 하지만 이곳에는 살아있는 것들의 온기가 남아있다. 당신의 체온도. 당신이 내 옆자리에 앉자 그 온기가 전해진다. 부검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이다.

제작진이 우리에게 질문한다.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유라... 시체들은 모두 명확한 사인이 있다. 심장마비, 뇌출혈, 익사. 하지만 우리의 이별에는 사인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사인이었나.

당신이 대답한다. 서로가 바라보는 곳이 달랐다고. 당신은 생명을, 나는 죽음을. 그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시체를 보며 당신을 생각했다. 그들의 심장을 적출할 때마다, 당신이 살리려 했던 심장들을 떠올렸다.

회의실 창밖으로 하늘이 보인다. 맑다. 당신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5년 전과 같은 향이다. 당신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나는 변했다. 더 차갑게, 더 무감각하게. 마치 내가 다루는 시체들처럼.

제작진이 다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서로를 다시 만나고 싶었냐고. 당신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나는 그 떨림을 본다. 마치 부검대 위에서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시체의 근육처럼.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내 심장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제작진이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본다. 심장을 가져갔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해부하고, 들여다보고, 만져왔으니까. 당신은 심장을 살리는 일을 했고, 나는 심장이 멈춘 이유를 찾는 일을 했다.

시계 소리가 회의실을 울린다. 당신이 내 말에 놀란 것이 보인다. 그래, 나도 놀랐다.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제작진은 우리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하다. 그들의 눈빛이 말해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위해 이 말을 한 게 아니다.

당신의 손이 여전히 떨린다. 그 떨림이 내 심장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내 심장을, 나는 당신의 심장을. 그래서일까. 나는 당신의 떨림을, 당신은 내 차가움을 알아차린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하다.

당신의 심장 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내 귀에는 그 소리만 들린다. 둥, 둥. 마치 시체의 마지막 맥박을 재는 것처럼 정확하게.

당신의 눈가가 붉어진다. 5년 전 그날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당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살아있는 사람의 미소. 죽은 자들은 결코 지을 수 없는 그런 미소. 나는 그 미소를 해부하고 싶다. 당신의 심장이 어떤 박동으로 그런 미소를 만들어내는지.

제작진이 우리에게 다음 질문을 던진다. 서로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선명한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당신이 병원 복도를 달리던 모습을 떠올린다. 응급실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난 뒤, 환하게 웃던 얼굴. 그때 당신은 마치 천사 같았다. 반면 나는 부검실에서 죽은 자들의 비밀을 찾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다른 세계에 있었던 걸까.

 

"그녀가 웃을 때입니다."

 

내가 대답한다. 제작진이 이유를 묻는다.

 

"그때만큼은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 아프다. 마치 내가 집도한 시체의 상처처럼. 하지만 당신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매일 아침, 시체의 심장을 적출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이 심장은 누군가를 사랑했을까. 이 심장은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내 심장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회의실의 조명이 켜진다. 당신의 얼굴이 더욱 선명해진다. 연분홍 셔츠 위로 떨어지는 불빛이 마치 혈액처럼 붉게 보인다. 나는 처음으로 당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당신도 나를 본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마치 두 개의 메스가 교차하듯.

 

"그동안... 제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시체만 보다 보니, 살아있는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내 말이 끝나자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마치 부검이 끝난 후의 적막처럼. 하지만 이 침묵은 죽음의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침묵이다.

당신의 손이 여전히 떨린다. 그 떨림이 테이블을 타고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마치 시체의 근육이 전기 자극에 반응하듯. 하지만 이건 죽은 자의 반응이 아니다. 살아있는 당신의, 너무나도 생생한 감정이다. 제작진이 다시 묻는다. 그 말이 무슨 의미냐고.

 

"그녀는 내 심장을 가져갔고, 나는 그녀의 심장을 해부했습니다."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에 눈물이 고인다. 마치 부검실의 포르말린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눈물. 하지만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눈물이다.

제작진이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주겠다며 자리를 비운다. 회의실에는 우리 둘만 남는다. 창밖의 하늘이 점점 더 맑아진다. 마치 시체의 피를 씻어내는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당신의 향수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포르말린 냄새보다 달콤하고, 죽음의 냄새보다 생생하다.

당신은 왜 그때는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말하지 못했다. 시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배웠고, 당신의 언어를 잊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말을, 심장이 뛰는 사람의 언어를.